



< Some @sometimesluvu >

수용성 연인
글레이드에 비가 내렸다.
민호는 미로 앞에 섰다. 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가 흐르는 모양이 기이하다. 왜인지 붉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유는 모른다. 척척하게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다. 가죽으로 된 러너 벨트에 손끝이 스치면 미끄러웠다. 금세 망가질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준비는 똑같은 속도와 손길로 이루어졌다. 작은 변수에 굳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좁은 터전에서의 일상은 매일 비슷하다. 엇나가는 건 컨디션 조절에 불리했다.
허리를 굽히고 앉아 신발 끈을 묶는다. 시야에 잡힌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동그랗게 일어난 파문이 이내 넓게 퍼져나간다. 마치 저것과 같다. 자신의 행동이 나비의 날갯짓에 실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민호는 습한 날이면 예민해졌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했다. 안전하게 달리기 위함인지 그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으나.
“굳이 나가야겠어?”
허리를 펴는 와중 목소리가 들렸다. 젖은 벽에 팔짱을 낀 채 어깨를 기댄 뉴트가 있었다. 민호는 껄끄러운 침을 삼켰다. 민호의 옷은 모조리 젖어 있었으나 뉴트는 상의를 입지 않았다. 미로의 자갈과 흙, 농기구와 나무에 쓸려 생긴 자잘한 상처와 흉터가 남은 흰 몸. 마른 근육이 잡힌 팔뚝 위로 고였던 물기가 미끄러진다.
“나가야지. 내가 안 뛰면 누가 뛰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네 파트너는 나올 생각도 안 하고 있어.”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어.”
“민호.”
“괜찮아, 인마. 그 정도 요령은 있다.”
땅이 울렸다. 미로가 열리려 하고 있었다. 뉴트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포대를 내밀었다. 무게감이 없었다. 공기만 들어찬 포대가 민호의 손 안에서 구겨진다.
“뭐야, 이건.”
“아무것도 안 넣었어.”
“그건 나도 알겠어. 왜?”
“왜일 것 같아.”
둘은 눈높이가 비슷했다.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서로의 홍채를 마주할 수 있었다. 검은 시선 두 쌍이 얽힌다.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지지 않음에도 움직이는 금발은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뉴트의 콧잔등에 주름이 져 있었다. 민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고집 부리는 거잖아, 너.”
러너는 평소 날씨가 궂은 날이면 뛰지 않았다. 공통적인 사항이다. 기억과 글레이드의 초기, 탐색을 강행했던 날마다 친구들이 죽어나가거나 망가지고는 했으므로. 안전을 위해,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라면 모를까 뉴트는 확실히 알고 있는 사항이다. 과거에 달린 경험이 있으니 당연했다.
“이 정도 비는 괜찮아.”
웃기는 소리를 한다. 다 알고 있으면서 억지를 부린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빗방울이 뺨을 때렸다.
“거짓말 마.”
“거짓말 아냐.”
“내가 어제 키스해서 그래?”
뉴트의 표정에 풀어질 기미가 없다. 민호는 차라리 얼굴에 매섭게 흩뿌려지는 것이 얼음과 물로 이루어진 주먹이라 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오늘은 안 뛰면 될 거 아냐.”
빈 자루가 바닥을 구른다. 민호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훔친 물기를 바닥에 뿌리고 자리를 피했다. 도망치고 있나. 스스로의 물음에 가볍게 긍정한다. 뉴트는 멀어지는 등을 응시한다. 속눈썹에 엉긴 물기가 시야를 가려 흐릿하다. 따라가기에 민호의 걸음은 너무 빨랐다.
***
“뉴트 기분 더러워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어떻게 알아.”
조악한 천막 안에 들어온 프라이가 입매를 비틀었다. 민호는 빗물에 적신 거친 천으로 신발 앞코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싸웠어?”
“아니.”
“아니면 왜 저래.”
“아,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내가 저 새끼 부모냐?”
장작더미가 땅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났다. 천막의 틈으로 부러진 나뭇가지를 든 뉴트가 보였다. 화를 눌러 참는 표정을 짓는다 싶더니 도로 내던진다. 그러모은 토막 위로 기름이 뿌려지고 불이 붙었다. 비가 떨어지지 않는 자리에 여럿이 모였다. 프라이는 바깥을 향해 눈짓했다.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좀, 민호.”
프라이가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너한테 짜증내서 미안한데 지금은 아니야.”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있다. 다르기는 다르되 어쩌면 같은 건지도 모른다. 민호는 반질반질하게 닦인 신발을 구석에 뒀다. 셔츠와 바지를 벗어 쥐고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다. 몸을 씻고 땀에 젖은 옷을 세탁할 좋은 기회였다. 모닥불 주변에 앉은 놈들도 죄다 알몸이었다.
“으, 진짜 보기 싫은 꼴이다.”
“너도 곧 합류하게 될 거야, 치프 러너!”
민호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손사래를 치고 글레이드의 중앙을 향해 걷는다. 흙바닥에 옷의 물기를 짜낸다. 몇 번 반복하면 구정물이 점차 맑아졌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퍼붓고 있었고 닿는 곳마다 물방울이 두들기는 소리가 거셌다. 고개를 한참 젖힌 채 사색한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잠들었을 밤, 뉴트와 민호는 맵실에서 키스했다. 당황한 민호가 허공을 더듬다 짚은 손에 의해 미로의 가장자리가 아주 약간 망가졌으며 뉴트는 멱살을 잡혔다.
‘너 씨발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왜 안 되는데?’
‘뭐?’
‘너도 나 사랑하는 거 알아. 왜 안 되는데.’
그 말에 대한 답을 돌려줬던가. 곧장 붙잡은 옷을 놓았던 건 기억하고 있다. 여름 냄새가 나는 빗물로 세수를 했다. 슬슬 계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주 가끔 눈이 내리고 가끔은 슬픔이 내린다. 질척한 발소리가 들렸다. 차게 식은 살갗에 미치는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확신 가능했다.
“뉴트.”
“…….”
“야, 똘추 자식아.”
민호는 얼굴을 쓸었다. 눈을 뜨면 바로 앞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뉴트가 서 있었다. 채 마르지 못한 머리카락이 다시 물기로 뭉친다. 꾹 다물린 입술과 내미는 손. 곧게 뻗은 손가락 여러 개의 한 마디만 걸쳐놓으면 끌어다가 손바닥에 검지로 글씨를 쓴다. 민호는 간지러운 느낌에 새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이어지는 선은 단어를 그리지 않았다. 구불거리고 꼬이는 털 뭉치 같은 모양만 만들어냈다.
“이게 뭐하는 건데.”
“지금 내 기분이야.”
“아, 그러셔.”
민호는 손을 탁탁 털었다. 물방울이 튀며 젖은 소리가 난다. 뉴트는 고작 한 마디를 내어놓고는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민호는 문득 이 상황이 거지같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범람하면 식은땀이 흐르건만 왜 함께 씻어낼 수는 없는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대답해. 뉴,”
“왜.”
“진작 좀 이렇게 빨리 대답하지.”
“참고할게.”
“웃기는 새끼. 야,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철지나 사랑마저 끝나고 나면 상실이 되나. 뉴트는 아홉 가지의 반박할 말을 떠올렸으나 밖으로 꺼내어놓을 작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쓴 숨 섞어 발음했다.
“그래…….”
“그래.”
“그러면 키스할래.”
“무슨,”
싫다는 말은 들은 바 없었다. 뉴트는 민호가 화를 내고 자리를 피할지언정 뺨과 귀 끝에 희미한 열기가 올라 있었음을 알았다.
“결국 너도 겁쟁이인 거지.”
뉴트는 답과 입술을 함께 삼켰다. 뒷목을 붙들어 입 맞춘다. 뒤편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혀와 숨은 섞일 일 없었고 둘은 내내 눈을 뜨고 있었다. 뉴트는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민호는 제 뒷목을 매만지며 멀어지는 등을 응시했다. 따라가기에는 서로가 품은 감정이 두렵다. 뉴트는 사랑을 정의하려 들지 않았으나 민호에게 그것은 이따금 죽음과 같았다. 손아귀에 감싸였던 피부가 모조리 식은 후에야 비가 그쳤다.


너에게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안녕, 민호.
너에게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너는 아닌 척하겠지만 서운해할테지. 하지만 편지를 보면 더 슬퍼할 걸 알아 쓰지 않았다. 아, 아니. 거짓말이야. 민호, 너는 슬퍼하기보다는 화를 내겠지. 격앙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다 씩씩대며 내게 달려오겠지. 그래서 쓰지 않았다. 내가 편지를 쓴다면, 너는 화를 내며 내게 달려올 테니까. 우리 풀어야 할 앙금은 다음으로 미뤄두자.
민호, 우리는 지금 널 구하러 왔다. 토마스에게 나쁜 물이 들었냐며 또 사지로 스스로를 내몬다고 화를 낼까? 하지만 내게 사지로 뛰어드는 희망을 가장 먼저 보여준 건 너였다. 우리는 함께 달리면서 끝이 없는 절망의 끝을 봤잖아. 너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고, 나는 내게 지워진 절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졌을 때 네가 나를 구했다.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고, 우리 모두 존재하지만 내 것이 아닌 희망을 좇으며 한없이 동적이기에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그 미로 속이 더 나았다고 사막에서 누군가 그랬었지.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편안해지고 싶었어. 하루쯤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선잠을 자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있는, 조악하고 위태로운 우리의 낙원. 나는 그때가 종종 그립다. 너라면 아마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우리의 진짜 희망을 찾아가겠지. 그리고 징징대는 우리에게 소리칠 것이다. “이 똘추야!”하고……. 나는 그렇게 네가 다그치는 소리를 정말 좋아했다. 우리가 함께 달릴 때, 모두 느낀 그 아득한 미로의 무게가 너라고 빗겨갔을까? 네가 우리보다 더 알고 있어서 그 순간순간을 버틴 걸까? 민호, 네가 다그치는 힘은 곧 너를 다그치는 힘이었다는 걸 안다. 너는 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너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끝까지, 끝까지, 가보고 싶었던 거지……. 네 스스로를 채찍질해가며 얻은 동력에 우리는 어느 정도 편승해 있었고,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가만히 있고만 싶을 때 네 다그침에 움직일 힘을 얻기도 했다. 내가 너무나 작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은 때, 그저 귀를 막고 구석에 박혀 있고 싶을 때, 그러니까 기가 죽었을 때가 우리에게는 있잖아. 너는 언제나 그런 나를 다그쳐 일어나게 했지. “똘추야!”라면서.
민호, 너는 항상 나를 일어나게 해줬지. 이제와, 네가 나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예민한 순간들에 네가 하는 이야기가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민호, 결국 이것만은 확실해. 너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네가 나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어. 그러니까 이제는 내 차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는 내가 너를 구덩이에서 끌어낼 때도 되었다. 비록 나를 바치더라도, 너는 화를 내겠지만. 민호, 꼭 내게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어. 우리 풀어야 할 앙금을 간직하고 있어.
민호. 앞으로, 앞으로 가. 네가 바라던 대로.
우린 다음에 꼭 만나.


< ㅅuㅍ @shifuu_uu >
모든 사랑이 꼭 맞닿아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기숙사 침대에서 뒤엉키며 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민호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얼굴을 찌푸렸으나 뉴트는 대답 대신 조금 웃었다. 욱여넣는 행위는 아팠고, 뉴트도 곧잘 통증을 호소했다. 맞닿는다는 건 꼭 로맨틱하지만은 않았다.
뉴트는 언제나 어려운 애였다. 같은 학년에서 그를 편하게 대하는 애는 알비 정도였을 것이다. 민호는 자신이 그와 많이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여름이 되면 뉴트는 더 오래 잔다는 것, 그리고 겨울을 좋아했다는 점, 머리가 좋아 공부에 요령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그리고 아마도, 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가정.
그러나 그가 곧 자신을 떠나갔을 때, 민호는 어떤 생각을 했냐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 매 학년 올라갈수록 배웠던 학문이 새롭게 부스러지는 것처럼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그런 생각.
통금 시간에 다다라 기숙사에 돌아오거든 뉴트는 항상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었다. 하루도 빠지질 않고 쓰는 탓에, 뭐 그리 쓸 게 많냐고 묻자 그는 그저 웃으며 곧 알게 될 거라고 얘기했다. 침대에 얌전히 누워 기다리면 뉴트는 오래 지나지 않아 일기장을 탁 덮어 두고 일어서 자신에게로 왔다. 키스는 때로 길었고 짧을 때는 옷자락을 훑는 손길이 이어졌다. 갈비뼈의 골격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더듬을 때가 좋았다.
그가 두고 간 일기장 표면을 매만졌다. 여러 번 읽었으나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 일기장은 대체로 고뇌였다. 사랑에 대하여. 뉴트,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 그리고 그에게 내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 머리 좋은 그가 아주 오래 고민할 정도로 어려웠던 의문.
“그래서 날 떠나갔어?”
일기장의 끝은 간략하게 끝마쳐져 있다.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어떤 이해를 바라고 시작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스스로는 도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날 사랑해. 그렇기 때문에 내 곁에서 나를 유일하게로만 둘 것이다.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우린 다시 볼 거야.
그 문장을 손끝으로 꾹 누른다. 약간 번진 흔적이 혹시 눈물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입술을 짓씹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그래서 문제고, 나는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어. 그래서 문제였지.
“나는 언제나 네가 필요해.”
우리는 퍽 안정적이었다고 여긴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채로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어. 사랑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서로만 알면 되고 서로만 중요하면 그게 전부라고. 그런데 네 사랑은 조금 다른 것 같네, 뉴트.
“어디에 있어?”
지금 당장 날 안으러 와 주면 안 돼? 나 네가 필요해. 언제나 네가 필요했어. 일기장을 꽉 끌어안고 신음하는 이의 뒷모습으로 길게 그림자가 진다. 달칵, 기숙사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계륵 @678_2340 >




< 고체풀 @newithmin >
M
5월 7일
어릴 때 옆집에 살던 친구가 다시 근처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거의 10년만이다. 어릴 땐 나보다 키도 작고 귀여웠던 것 같은데, 엄마 말로는 키도 크고 엄청 잘생겨졌다고 한다.
다음 주 부터 우리학교로 온다고 했다. 어릴 때 엄청 친했었는데, 학교도 같이 다니면 재미있겠지. 기대된다.
5월 11일
뉴트가 우리 반으로 왔다. 엄마 말대로 정말 다른 사람 같이 멋있어졌다. 밖에서 봤으면 못 알아 볼 뻔 했네. 낯가림을 하는지 애들이 우르르 몰려가 말을 거는데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내가 많이 도와줘야지.
5월 14일
뉴트는 뭐든 잘한다. 성격도 좋아서 반 친구들하고도 금방 친해졌다. 그러면서 운동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나보고 잘한다고 칭찬한다. 민망해서 '그러는 너는' 하고 퉁명스럽게 받아치면 씩 웃는다. 뉴트는 참 좋은 녀석이다.
5월 23일
옛날 얘기를 하면 뉴트는 시시콜콜했던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어서 신기하다. 덕분에 요즘 등하굣길이 즐겁다.
5월 29일
기다리던 체육대회 날이다. 축구 결승에서 뉴트랑 환상의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펼쳐 갤리네 반을 납작하게 눌러줬다. 계주에서는 질 뻔 했는데 뉴트가 역전하고 내가 큰 차이를 벌려 이길 수 있었다. 오늘은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이다.
6월 13일
뉴트랑 새로 나온 공포영화를 보러 갔다. 그동안 공포영화는 혼자 보러 다녔는데 다행히 뉴트도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뉴트는 나랑 취향이 잘 맞는 것 같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죽이 잘 맞는다. 영화가 생각보다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뉴트 팔을 움켜잡았는데 뉴트가 내 손등을 토닥토닥 해줬다. 다 보고 나서 밝은 데로 나왔더니 좀 쪽팔려서 뉴트랑 어색하게 헤어졌다. 다시 생각해도 쪽팔리다.
6월 20일
기말고사 기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다 같이 뉴트네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사 온 뉴트네 집은 처음이다. 옆집에 살 땐 우리 집처럼 드나들었던 것 같은데. 정원에 분홍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뉴트네 엄마가 꽃을 좋아하신다고 했던가.
공부를 하는데 역시나 토마스 놈이 문제다. 맨날 장난이나 치고 남 공부하는데 방해만 하면서 성적은 좋은 얄미운 놈. 갤리랑 내가 구박 할 땐 씨알도 안 먹히더니 뉴트가 말하니까 좀 듣는다. 망할 똘추 자식. 뉴트랑 함께 하길 잘했어.
7월 3일
시험 끝! 조금만 참으면 방학이다! 놀러 나가자는 토마스를 뿌리치고 뉴트랑 집에 가면서 방학 때 뭘 하고 놀지 신나게 떠들었다. 빨리 방학이 오면 좋겠다.
7월 6일
뉴트 가방 속에서 하트가 붙은 편지가 나왔다. 노트좀 잠깐 본댔더니 그러라고 해놓고 다급히 말을 바꾸길래 뭐지 싶었는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게 뭐냐고 놀리고 싶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그만뒀다. 잘생긴 놈은 만화에서나 나오는 일을 실제로 겪는구나.
7월 7일
그러고 보니 뉴트는 인기도 많은데, 왜 애인이 생길거란 생각을 안 해봤는지 모르겠다. 뉴트한테 여친이 생기면 지금만큼 붙어 다니지는 못하겠지. 다정한 놈이니까 지극정성으로 잘할거야. 상상하니까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7월 10일
고백을 받았다. 무시할 줄 알았는데 나와줘서 놀랐다니, 내가 그렇게 매너 없는 놈처럼 보였나? 미안하지만 고백은 거절했다. 괜찮은 애 같았는데, 역시 첫 연애는 내가 좋아하는 애랑 해보고 싶다. 만약 내가 먼저 연애를 한다면, 뉴트가 서운해 할까?
7월 11일
밤에 자다가 깼다. 이게 그 성교육 시간에 들었던... 망할..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보건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는데, 상대가 제일 친한 친구인 것도 자연스러운 걸까?
7월 20일
학교가 시끌시끌하다. 다른 반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 징계위원회가 열린다고 했다. 우리 반에는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하긴 내가 반장으로 버티고 있는데 어떤 놈이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
7월 22일
요즘 뉴트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어렵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자꾸 얼굴이 화끈거리고 망할놈의 심장은 왜 이리 빨리 뛰는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아무래도 그 똘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생각할수록 미쳐버리겠다. 그만 생각하자.
7월 23일
친구사이라도 끝장나지 않으려면 숨겨야겠지. 젠장, 짝사랑이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네. 그래도 내일이면 방학식이다. 한동안 안보면 좀 괜찮아 질 거야.
7월 24일
뉴트가 계단에서 굴렀다. 왜 자길 피하냐며 나에게 따지다 뛰어오는 애들을 보지 못하고 계단 끝에서 밀쳐졌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7월 24일
망할 똘추 자식, 왜 눈 뜨자마자 내 이름은 부르고 지랄이야. 어쩌면 좋지. 나 정말 뉴트를 너무 좋아하는데, 정말 어쩌면 좋지.
7월 24일
떨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완치는 되겠지만 다 나아도 무리한 운동은 피하라고. 미안해, 미안해 뉴트..
7월 31일
요즘 뉴트가 유난히 다정하다. 원래 이런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자책하지 못하게 하려는 게 빤히 보여 더 마음이 아프다. 속없이 착한 놈. 이러면 내가 포기하기 더 힘들잖아.
8월 4일
맙소사, 뉴트가 나를 좋아한댄다. 말도 안 돼. 꿈인가? 아니면 누가 몰카라도 찍고 있나? 토마스랑 갤리놈이 뉴트랑 짜고 나 보고 웃고 있는거 아냐? 난 대체 그동안 왜 삽질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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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월 n일
요즘 하루하루가 꿈같다. 뉴트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데 나도 참 똘추같네. 이런게 첫사ㄹ.. 에이 씨, 오글거려.
오래오래 함께 하자, 사랑하는 똘추야.
N
5월 7일
다시 돌아왔다. 민호는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네. 기쁘다.
5월 11일
전학간 학교에 첫 등교를 했다. 아직 낯설으니까 민호가 있는 반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교실에 들어가 한눈에 민호를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민호가 웃는다. 귀찮게 구는 애들은 민호가 와서 잘 정리해줬다. 여전히 다정하구나, 민호.
5월 14일
민호는 축구를 좋아한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 반장도 놓친 적이 없다고 했다. 어딜 가나 중심에는 민호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5월 19일
기억나? 민호, 우리 크면 결혼하자고 네가 그랬었지. 네가 신랑 하고, 내가 신부 하고. 그때도 지금처럼 등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는데.
5월 23일
어릴 때의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주다 보면 민호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워한다. 어린애처럼 변하는 민호의 표정이 너무 귀엽다.
5월 29일
달리는 민호는 아름답다. 달릴 때의 진지한 표정도, 멈춰 선 뒤 붉어진 얼굴에 맺힌 땀방울도, 물을 넘기느라 보기 좋게 움직이는 울대뼈의 모습도 어디 하나 못난 구석이 없어. 평소보다 활기찬 민호의 모습에 나도 즐겁다.
6월 13일
공포영화에는 별 흥미가 없지만 민호가 보고 싶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사실 영화 내용보다 놀라는 민호의 모습을 감상 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다 보고 나서 민망해 하는 모습도 귀여웠고.
앞으로 공포영화는 나랑만 보러 다니자, 민호.
6월 20일
진지하게 공부하는 민호도 좋다. 책보다 민호 얼굴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짜증을 내는 모습도 귀엽지만 민호가 스트레스 받는 건 싫다. 단 둘이었다면 더 좋았을걸.
7월 3일
시험 전부터 꾸준히 방학 계획 이야기를 해 두길 잘했다. 민호의 관심사가 '나와 함께 하는 시간' 에 쏠려 있다는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야.
7월 6일
민호의 서랍속에 편지가 들어있었다. 구닥다리 같은 방식에 어울리는 뻔 한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혹시나 싶어 집에서 처리하려고 가방 안에 넣어 둔 것이 실수였다. 민호에게 들킬 뻔 했을때는 정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노트 같은 건 내가 직접 꺼내줬어야 하는건데. 민호가 눈치 채지 못해서 다행이다.
7월 10일
민호 서랍에 편지를 넣은 멍청이가 민호를 직접 찾아와 고백했다. 보통은 편지의 답장이 없으면 포기 하는게 정상 아니야?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그래도 천만 다행으로 민호가 거절을 했다. 만일 승낙했더라면..아니,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않는 게 좋지. 거절해서 정말 다행이야.
7월 20일
잘가라. 다음 학교에선 눈치좀 키워서 임자 있는 애한테 고백한다고 나대지 않는 게 좋을거야. 쓸데없이 하지도 않은 일 덮어쓰지도 않길.
7월 21일
요즘 민호가 이상하다. 자꾸 날 피하려고 해. 안 돼, 안 돼 민호. 날 좋아하면서 왜 피하려고 해? 난 네가 자각하길 기다렸는데, 네가 놀라지 않고 날 받아줄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는데. 안 돼, 민호.
7월 23일
안돼. 도망가지 마, 민호.
7월 24일
하굣길을 노려 민호를 붙잡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가 잘못한 것이 있냐고 하니 시선을 피한다. 사랑스러운 민호,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짓궂은 방법을 쓸 수밖에 없잖아.
7월 24일
민호가 울었다. 울릴 생각은 없었어. 미안해. 미안해, 민호.
7월 24일
떨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렀다. 치료가 잘 안됐다면 평생 다리를 절 뻔 했다는데, 어쩌면 그 편이 나았을지도. 그래도 오늘부터 방학이라 다행이다. 민호가 매일 병문안을 와 줄테니.
7월 30일
내 다리가 다친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민호.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8월 4일
민호가 나 때문에 혼란스러울 때, 민호에게 아직 죄책감이 남아 있을때, 민호가 나 때문에 고민할 때, 민호가 나 때문에...
.
.
.
n월 n일
민호가 내 앞에서 웃는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민호. 네 미소를 위해서라면 난 어디든, 무엇이든... 항상 내 곁에만 있어. 날 떠나면 안 돼, 민호.
Victorian flower language
Pink Rose - First love, Innocence, Healing
Wisteria - I cling to you.




기다림의 결과
.공수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마다 답답함이 그를 덮쳤다. 언제나 자신만 말해야하는 상황을 생각해 본적이나 있는가. 다른 연인들이라면 함께 수다를 떠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민호와 그 애인은 일방통행 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니 연애가 아닐지도 몰랐다.
민호가 사랑하는 사람이자 민호와 사귀고 있는 사람.
뉴트
뉴트 아이작
학교의 명물로 불리는 이른바 엄친아의 뉴트 아이작이었다.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타인을 잘 챙겨주고 성격 좋고 돈 많고 이를 전부 충족하는 그를 그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뉴트의 애인은 민호였다.
비밀연애. 비공식 캠퍼스커플 이라는 의미였다. 뉴트와 민호는 대학에 와서 처음 안면을 튼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애인으로 발전할 수 있던것은 민호의 적극성 덕분임은 확실했다. 뉴트 못지않게 인기가 많은 민호였음에 두사람은 더 빠른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가 민호에게는 시련으로 다가왔다.
뉴트는 누구에게나 착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꼭 누구에게 한정된 것이 아닌 다른 모두에게도 그러했다. 민호와 타인을 동일시 대했다. 둘만 있을때도 마찬가지였으며 두사람은 손깍지 이외에 스킨쉽은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둘이 연애를 시작한지 반년이 흘렀다. 그리고 민호의 고민 또한 그 시간과 함께 이어졌다. 민호가 뉴트에게 정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뉴트가 민호에게 정이 떨어지지 않았다고는 확신하진 못했다. 그것이 민호의 생각이었다. 누구나 뉴트의 행동을 보면 오해하기도 하며 기대하기도 하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뉴트는 고자라는 소문까지도 돌 정도니까. 이 소문들이 모두 민호에게는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만일 뉴트와 민호의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면 민호나 뉴트 두사람의 평탄한 일상은 이제 더이상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민호는 그것이 두려워서 뉴트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발설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뉴트는 그런 민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누구에게나 친절하고도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런 면모를 볼 때 마다 민호는 뉴트가 정말 자신과 사귀는 것이 맞는지 설마 자신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그런들 뉴트가 민호의 마음을 알까. 뉴트는 정말 민호를 아주 가까운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민호는 뉴트의 단순한 친구일수도 있었다.
일명 애인인 친구사이.
그런 생각까지 미친 민호는 절망과 동시에 혼란이 찾아왔다. 뉴트에게 이 생각을 말한다면 아무리 그런 뉴트라도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이냐고 실망할 수도 있을거라며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껴안았다.
'정신차려 박민호.'
부정과는 거리가 멀던 그였음에 요즘들어 왜인지 우중충해진 민호는 다른 과 사람들까지 눈치챌만한 가십거리였다. 그리고 그 오르내리는 말에 반응하는 것은 민호의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자신의 연인의 상태도 가늠하지 못한것일까. 아니 그럴리 없다. 민호와 다르게 뉴트는 분위기도 눈치도 꽤나 좋은 편이었다. 아니 좋기만 하다기엔 부족할 정도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민호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은것은 당연하게도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뉴트는 입가에 작은 조소를 띄우고는 민호를 찾아 나섰다. 애초부터 민호가 있을 곳 정도야 다 파악하고 있었음에 느긋한 발걸음은 뉴트가 민호를 그리 중요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듯 해보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민호가 알 수 있을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민호.'
갓 로스팅 한 원두의 향이 진하게 내리깔린 작은 빈티지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뉴트의 입에는 그의 이름이 담겼다. 뉴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민호는 그가 생각에 잠길일이 있으면 항상 앉아있는 구석자리에 늘 과 같이 앉아있었다. 뉴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닌지. 아니면 환청이라 생각하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민호는 그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민호'
다시 한번. 뉴트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서야 민호는 뉴트를 응시했다.
'뉴트. 여긴 무슨일이야?'
'애인한테 오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나?'
지금껏 뉴트가 민호를 애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정말로 존재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민호를 잠식 시켜가고 있을 때 나타난 뉴트는 민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뿐이었다.
'애초에 내가 네 애인이긴 했냐고..'
미간을 접히며 개미기는듯한 작은 목소리로 주얼거렸지만 뉴트가 아무런 미동이 없는것을 보면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한 축 이었다.
'민호. 요즘들어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모른다는 듯 말하는 뉴트의 말에 더 싫증이 날 뿐이었다. 민호는 뉴트가 보란 듯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얼굴을 마저 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행동은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의미였음에 뉴트는 그 의미를 바로 알고 민호의 옆에 조용히 앉을 뿐이었다.
십분. 이십분. 몇 분이 지났을까. 이미 뉴트는 본인이 시킨 아메리카노를 전부 마시곤 책을 반쯤 읽어가고 있었다. 끈질기고도 착해빠진 뉴트. 민호의 감상은 이것뿐이었다. 이상은 민호가 더 버티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머리를 헤집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네가 있는 한 괜찮아지지 않는다면?'
'내가 있어도 괜찮아질 때까지'
이 이상 뉴트에게 뭐라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민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헤어지자고 말하기엔 민호 자신이 뉴트를 너무나 좋아했으며. 멀어지자고 말하기엔 뉴트는 본래 자신의 곁에 서있지 않았다.
원두 향에 후각이 익숙해져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쯤에서야 민호와 뉴트는 카페를 나섰다. 바깥바람은 시원했으며 시원하다기 못해 추웠다. 상쾌한 바람에 조금은 잡생각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마저도 들 정도로.
'어디갈거야.'
'오늘은 너랑 같이 있을거야.'
'다른 녀석들이나 봐주지 그래'
'오늘은 너랑만 있을거야.'
'오늘은 이잖아.'
오늘만 이잖아. 이어지는 뒷말을 내뱉지 못하곤 입을 다물었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과오임을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민호.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무슨 의미야.'
정말 몰라서 묻냐는 듯 민호가 미간을 좁히고 뉴트를 바라보지만 뉴트마저 민호와 같이 무슨 의미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만 민호와는 다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네가 날 바란다는걸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의미야.'
'헛소리.'
'그래 그것처럼'
화사한 미소. 민호가 반한 계기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저 미소에 반하고 성격에 반하고. 또 그와 함께있으면 자신이 뉴트에게 가장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기에 그것에 또 반했다.
자신이 그에게 정말 특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너 지금 나 가지고 놀고있는거지.'
'무슨의미야?'
또.
또 민호만 멍청이가 되어간다. 민호 혼자 솔직해야하며 뉴트는 혼자 민호의 부끄러운 모습이던 무슨 모습이던 보려한다. 민호는 볼 수 없는 뉴트의 모습을 갈망할 뿐 그것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민호가 무의식중에 꽉 쥐어낸 주먹에 손바닥은 이미 푸르게 손톱자국이 나있었다. 일정한 규격으로 움푹 파인 손톱자국이 지문으로 느껴졌다.
'내가 애인이라는 자각은 있긴 한 건지 모르겠어.'
지금껏 혼자서만 연애를 하고 있는 듯한 것이 오래였다.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말이 나왔다. 아니 나오길 바랐지만 나오지 않던 말이 나왔다. 혼자서 울컥해서는 뉴트에게 지금까지 혼자서 고민해오던 말이 드디어 내뱉어졌다.
민호는 뉴트와 되도록이면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넘기는 것이 더 편했다. 싸움은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말이다. 연애에 대해서 소심한 민호는 뉴트의 사냥감이 되기 쉬웠다. 뉴트에게 있어서 민호는 자신의 것이었다. 이미 손에 들어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
자신 혼자서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들어오기를 말이다.
결국은 민호는 뉴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싸움을 해도 어차피 민호는 뉴트를 버리지 못하는 한 뉴트의 안에서 발버둥 치는 일만 이어질 뿐 일 것 이었다.
'뭐가 문제인데?'
'뭐?'
'내가 그럼 어떻게 널 대해야 애인이 되는거냐고'
허. 허탈한 숨소리가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민호는 가만히 뉴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처구니 없다는게 이런 때가 아닐까. 알면서도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인지 지금까지의 뉴트의 행동으로는 민호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을 놀린다면 또 어떻고 아니면 모른다면 또 어떨지 민호가 해야 하는 행동은 이미 답이 나와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마다 항상 먼저 말을 해야 하는 쪽은 민호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뉴트에게 거절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민호는 그리 생각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스킨쉽은 손깍지에 데이트는 도서관.서점.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하.
그러니까. 민호는 지금 스킨쉽이 더 하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다는거지?'
'아니...'
'그런거라면 말해주지 그랬어. 나는 민호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게 더 즐거워보여서..'
'...뭐..?'
민호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진한 애인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속고있는 기분때문인지 그것은 민호가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민호에게도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싫증나는 상황이라는 것쯤은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싫증이 나는 시간.
'그러니까. 난 모른다고 했잖아.'
싱긋 웃으며 민호의 손을 끌어잡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뉴트에 민호는 어떨떨하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단지 그 뿐은 아니었을테다. 뉴트의 악력이 더 한 몫한 것도 있었다. 민호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못하고 뉴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둘에게 신경쓸 겨를도 없다는 듯이 그저 지나쳐갈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사사건건 신경 쓴다면 그것도 웃길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뉴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민호의 자취방이었다.
자취방이라고 해도 뉴트가 들어온 적은 두어번 정도가 그만이었다. 그리고 민호는 그것이 자신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과거에는 그랬었다.
뉴트가 뒷모습이 아닌 정면을 보이며 민호가 반한 미소를 화사하게 지어냈다. 정말 짜증날정도로 이쁜 미소라서 민호는 설렐 수밖에 없었다.
'그래. 민호가 스킨쉽이 하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알려준적도 없는 자취방의 비밀번호를 치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민호는 뭐라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뉴트가 문을 연 것보다 뉴트가 자신의 자취방에 자신을 끌고 왔다는 것부터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민호는 이런 걸 원하는 거잖아.'
무슨-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막히는 입술에 몸이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입을 막은 것이 지금 것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라 입을 막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입술.
동그랗게 뜬 눈동자에 비춘 것은 간격 따윈 무시하고 다가와있는 뉴트의 얼굴이었다. 민호의 입술에 닿은 것은 뉴트의 입술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놀라서 밀쳐내지도 소리치지도 거부하지도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민호에 뉴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민호의 눈을 맞춰 바라봤다.
싱긋 눈꼬리를 접어웃으며 민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입술을 떼어냈다. 천천히 자신의 입술에 묻은 물기를 엄지로 닦아내고는 민호의 손가락 사이를 맞춰 손가락을 끼어넣으며 깍지를 껴올렸다.
'그러니까. 말을 해줘. 키스던 포옹이던 깍지던. 난 말해줘야 안다니까 민호.
그리고. 말해주면 해주는거. 네 한정이야.'
싱긋 웃는 얼굴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민호의 심장을 예사롭지 않게 쥐어짰다. 민호는 상황이 이해되는 순간 얼굴을 붉어진 것도 모르곤 물기 가득한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민호가 그만하라하면 그만하고. 해달라 하면 다 해주는데. 왜 아무말도 안해?'
염치없어지라는 그 말과도 같은 뉴트의 말에 민호는 한참을 입다물다 고개를 숙이고는 한숨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럼.... 좋아한다고 말해줘..'
'......'
뉴트는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에 민호는 조금 가슴을 졸였다. 이정도도 못해줄거라면 왜 자신에게 말하라고 했는지 분하기도 했지만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와 차가운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기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더 하고 싶은데. 민호."
민호의 얼굴보다 차가운 손길이 민호의 두 뺨을 어루만졌다.
"사랑한다는 말은 싫어?"
"........
....아니....
..좋아.."
이 모든 것이 뉴트가 민호를 재촉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민호가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솔직해지다 못해 뉴트를 쥐어 잡는 민호가 되는데 또한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
< 공수 @gong_su_tet >




< 또마 @AejrwlfrP >


뉴트 아이작은 어려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가 못하는 일이라는 건 하나도 없었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그야말로 보기 힘든 “완벽”의 존재였다. 부모님조차 자신의 아들이 천재라며 좋아했었다. 원하는 것이라며 모두 손에 쥘 수 있게 했지만 정말로 뉴트가 원했던 건 값비싼 물건들이 아닌 부모님으로 받는 사랑이었다. 가끔식 차를 타고 다니다 보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 애들이 부모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게 부러웠었다. 천재라 불리는 뉴트 또한 어린아이였고 나이에 맞게 사랑을 갈구했지만 그런 부모님한테서 돌아온 것은 매정한 거절뿐이었다. 마음이 쓰라려 왔지만 괜찮았었다. 가끔식 다른 사람들이 내뱉어주는 칭찬을 들으면 사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거였다. 뉴트는 눈치 또한 빨랐고 상대방이 정말로 좋아서 칭찬해주는 것이 아닌 제게서 무언가를 원하기에 대하는 것뿐이었다. 뉴트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그에게 친절했으며,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한 말들만을 내뱉었다. 장차 크게 될 그릇이라던가, 자신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말 좋아한다 등. 물론 자신의 뒤에 붙어있는 부모님들의 타이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뱀처럼 간사하게 속삭이는 달콤한 말을 내뱉어 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잘 보이려 했던 사람들이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집착했을까.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고장난 장난감처럼 입에서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하하.
사랑이란건 애초에 없었어 뉴트. 뭘 기대한 거야. 미친 듯이 웃고 나서야 마음이 공허해진 걸 알아챈 뉴트는 그 뒤로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로 결심했다. 또한,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 뉴트는 친절이라는 가면을 씌어 사람들과 대면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늘날같이 사교 파티에 참석한 날에는 특히나 더했다. 하하 호호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사람들의 시선들. 토가 나올 정도로 가식적이었다. 와인 잔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에게 사람들이 다가왔다. 흘긋 바라보며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고는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담. 더 아름다워 지셨네요.”
“어머나~ 호호, 뉴트~ 그새 많이 컸구나.”
“별말씀을요”
내심 기분 좋은 듯 웃는 마담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마담의 인조적인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자신의 딸과 잘 어울리겠다며 만나보지 않겠다는 마담의 말에 감사하지만 괜찮다며 정중한 거절의 말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직도 코끝에서는 진한 향수가 냄새가 머물러 있는 거 같았다. 짜증나. 낮게 읊조리고는 제 코를 매만지며 걸어가던 그 순간 쿵. 하고 누군가와 부딪혔다. 뉴트는 엉덩방아를 찌며 넘어졌고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자 동양인 소년이 서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파티는 처음이라서...”
자신의 주위를 멤도는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잘못한 건 명색히도 나인데 자신이 먼저 사과하다니. 엉덩이를 묻은 먼지들을 떨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하자 잔뜩 죽을상이었던 얼굴에 표정에 풀어지는 걸 보고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다행이다.. 내 이름은 민호에요 그쪽은요?”
인사를 청하며 손을 내민 남자가 씩 웃어보이자 깊게 파이는 보조개와 눈 밑에 접히는 애교살. 왠지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귀여워? 뉴트 아이작 너 미쳤구나 남자한테 귀엽다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내민 손을 잡았다.
“뉴트. 뉴트 아이작이에요.”
“반가워요 뉴트. 그럼 즐거운 파티 되세요.
방긋 웃어 보이며 제 할 말만을 하고는 빠르게 사라져 가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야에서 벗어나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 사라진 남자의 흔적을 시선으로 쫓아보지만 이미 사람이 사이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거라고는 제 손에 남겨진 남자의 온기. 뉴트는 남자의 체온이 남겨진 제 손을 코에 박고는 남자의 이름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민호. 민호라고 했었지? 다시 만나는 날을 기대할게요. 민호.
몇 년간 차갑게 식어있던 뉴트의 심장이 작게 꿈틀거렸다.


< 법정 @SUBJ3CTA5 >
새벽부터 쉬지 않고 내린 비가 온 땅을 적셨다. 어슴푸레한 하늘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날씨가 이래선 일도 못 하잖아. 보수 좀 하려 했더니 짜증나게. 갤리가 퉁명스러운 낯으로 뇌까렸다. 뒤따르는 대꾸는 없다. 탁자에 걸터앉아 새끼줄을 꼬던 금발의 소년 역시도 말없이 미소를 짓는 게 전부였다. 뉴트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우중충한 날씨는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뇌리에 얽힌 모든 상념이 빗소리에 감추어져서. 잠시나마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은 참 소중한 것이었다. 벽에 새긴 이름이 하나씩 지워지고 차기 리더라는 감투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그랬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구른다. 찾는 이가 없다는 건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마지막 매듭을 짓고 나서야 뉴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차 젖어드는 걸음은 막연한 확신에 차 있었다.
“민호.”
“어, 뉴트.”
경험에 의존한 확신은 배신하는 일이 없다. 지난 삼 년의 세월이 남긴 견문이었다. 민호는 오늘도 지도실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모형은 먼지가 한 꺼풀 덮여 있다. 더 이상 고칠 게 없는 지도를 곱씹으며 계속해서 미로 속을 달리는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어 걸음 뒤에서 응시하는 민호의 뒷모습은 여상스러웠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뉴트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오랜만에 쉬는 기분은 어때.”
“당연히 좋지.”
뭘 물어. 민호가 얄궂은 웃음을 흘렸다. 줄곧 지도실을 지키던 이가 늘어놓기에는 다소 모순인 말이었다. 늘어지는 간극은 오롯이 고요로 메워지고 창가를 때리는 빗줄기가 그 틈을 비집었다. 익숙한 적막이다. 그들은 켜켜이 쌓이는 의문에 구태여 해답을 얻어내려 들지 않았다. 침묵은 신뢰를 기반한다.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게 처음으로 구축됐던 날이 떠올랐다. 오늘처럼 비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던 어느 밤, 뉴트는 불현듯 충동에 휩싸였다. 벗어나고 싶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망각으로부터. 온몸을 좀먹어가는 공허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미로가 열리거든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자. 바르작거리는 소리는 빗속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할 거야. 엉성하게 엮은 나뭇가지 새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폐부를 그득 채워 익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살갗에 닿는 차가운 액체가 꼭 구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굉음이 들려올 무렵, 눈꺼풀 새로 스며든 건 우습게도 빗물이 아닌 햇빛이었다. 처참했다. 높은 곳까지 기어오르니 글레이드에 부딪히는 햇살이 빌어먹게도 밝아서 한없이 자조했다. 온몸이 진창에 처박히는 찰나에야 착각에서 깨어난다. 아. 이건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족쇄구나. 나는 죽어도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고. 그렇게 미련에 잠식된 채 생을 마칠 줄 알았더니 아득해지는 시야에 엉망이 된 두 발이 들어찼다. 귓가에 엉겨 붙는 이명 사이사이로 거친 호흡이 파고들었다. 투박한 손길은 뉴트를 안았고, 다급하게 뜀박질하는 동안 달리 꺼내는 말은 없었다. 의문이나 질책을 비롯한 그 어떠한 것도. 그으래, 이런 침묵이다. 뉴트는 너른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의무실로 가는 내내 흐느꼈다. 글레이드에서 흘린 처음이자 마지막 눈물이었다. 그날 이후로 뉴트의 삶, 그 중심에는 민호가 있었다.
“뭘 그렇게 봐.”
“키스하고 싶어서.”
가늘어지는 눈초리를 보니 막을 새도 없이 웃음이 앞선다. 기실 추락 이후로 뉴트는 이따금씩 자신이 산송장 같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던 지난날의 과오는 낙인이 되어 여즉 발목을 붙들었다. 혐오가 고개를 들이밀 때마다 중재해 주는 건 어김없이 민호였다. 민호 앞에서 유난히 선연해지는 맥박으로 뉴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또한 모순이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나. 문득 의문이 들었다.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숨을 여러 차례 섞었지만 둘은 단 한 번도 사랑을 말한 적이 없었다. 온전하지 못한 이름 하나를 제외하고는 죄 여백인 기억에 새겨 넣은 거라고는 살아남는 방법뿐이었고, 오직 살기 위해 달렸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뉴트는 괴리감이 드는 단어라 생각한다. 감정의 색은 자주 모호해진다. 사랑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무채색이 되어도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걸까. 겨우 십 대의 소년들에게 사랑이란 건 낯설고 어려운 것이었다.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무엇 하나 해답이 달리는 건 없었다. 이마저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을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배회하던 눈길의 종착지는 어느새 옆으로 온 소년이었다. 민호의 새까만 눈이 뉴트를 비쳤다. 자신과 엇비슷한 색채를 가진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며 뉴트는 마지막 질문을 내어 놓는다. 관계를 구태여 정의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뉴트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자신의 중심에 그가 있는 것처럼, 그의 중심에도 자신이 있을 거라는 것. 여전히 비가 내린다.






< 비빔 @August0818 >
“내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파멸이 내 영혼을 붙잡아 가기를.
내 그대를 사랑 않을 때 이 세상은 다시 혼돈에 빠질 것이다.”
- 오셀로, 제 3막 3장 90~92행
뉴트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채 미로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심장 속에 어딘가 상실된 조각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은 무(無)가 아니라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뉴트는 미로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진작에 내버린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깊은 절망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자살 시도는 포기보단 오기에 가까웠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면, 내 자신의 죽음이라도 마음대로 하리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빌어먹을 운명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질긴 목숨과 세 동강난 다리는 짐이었다. 심장 한편에서부터 시작한 어둠은 어느 새 뉴트 자신보다도 커졌다. 통증에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소리 없이 의료실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뉴트의 옆에서, 그를 발견해 미로의 입구까지 부축해 데려온 민호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속으로는 부상당한 자신보다도 더 아파하는 게 빤히 보였다.
직설적인 언행과 결코 말로만 끝나지 않는 결단력. 이것이 뉴트를 비롯한 모든 글레이더들이 평소에 민호를 묘사하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뉴트는 맵실에서 혼자 있을 때면 모두의 불안과 무기력함을 대신 끌어안고 소리없이 슬픔만 흘리는 민호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림자조차도 그 원천이 너무 밝아서 생긴 듯했다. 민호는 정말로 태양같은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각에 모두의 희망을 가지고 미로로 떠났고 비록 출구를 찾아오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들의 희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돌아왔던, 지난 3년의 민호. 그런 민호에게 어느 날 떨리는 목소리로 '너의 희망은 내가 가지고 있어도 될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고 민호가 곧 해사하게 웃으면서 긍정했을 때. 뉴트는 글레이드의 바람소리, 아이들의 대화소리,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소음들이 민호의 대답 뒤에서 사그라들며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뉴트는 그렇게 빛나는 사람에게 자신 같은 결핍된 사람이 결코 가까이 다가갈 자격이 없다는 내면의 어두운 속삭임을 들었다. 처음으로 어둠이 저에게 말을 걸었던 때였다.
글레이더들이 많아지고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도 어떻게든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러너들이 그리버에 공격당하는 비율도 점점 줄고, 뉴트도 다리 부상 이후 주로 의료팀이나 잡무팀 일을 도와주며 나름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어둠은 그 날 이후로 뉴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 할 정도로 희미해졌다. 뉴트는 거의 처음으로 찾아온 고요함에 어색해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야 톱니바퀴가 딱 맞물려 돌아가는 듯했다.
***
... 그리고 이 모든 건 그 신참이 올라오고나서부터 어그러졌다. 어둠은 그 틈을 타 착실하게 크기를 키워갔다. 토마스만 없었더라면, 토마스만 ...
그랬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닥쳐올 불가역적인 미래를 무시하고 애써 현재만을 안주하는 것은 분명히 결말이 좋지 않았다. 뉴트는 10대 남자애들만 가득한 글레이드를 잘 이끌어 나갈 결속력을 주는 접착제같은 역할이었다. 매우 이성적인 만큼 머리로는 이 분노가 올바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렇게 하는 게 탈출구를 찾는 데에 가장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참 주제에 러너 자리까지 꿰찬 모양이 맘에 들지 않았다. 민호 옆에서 하루 종일 같이 달리다가 글레이드로 돌아오는 걸 지켜볼 때마다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할 수만 있다면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민호도 책임이 있었다. 민호를 ㅡ
방금 뭐였지?
뉴트는 멍하니 있다가 다른 사람의 말을 흘려 들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건 분명,
아니다. 뉴트는 문득 드는 생각을 애써 지워냈다.
이게 사랑이어야 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의 정의가, 사랑의 정의가 맞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 차게 될 테니까.
***
민호가 위키드에 잡혀갔다.
뉴트는 어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가 그렇게 날 잠식시키고 이용하고자 한다면, 나도 널 이용해서 민호를 가지겠다.






뉴트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민호와 함께였다. 프렙, 주니어스쿨부터 같이 걸어와 왕립 컬리지에 입학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혼자가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둘은 언제나 한 쌍이었고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제 뉴트는 민호의 모든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잘 모를 사소한 것들까지.
옆자리에 앉은 민호는 심드렁한 얼굴로 페이퍼를 내려보고 있었다. 가타부타 불평을 내어놓지는 않았으나 내키지 않는 시선이었다. 민호를 따라 눈을 돌리자 마침 교수의 설명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형식과 내용은 자유, 제출은 내 메일로 하면 됩니다. 중간고사를 과제로 대체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고저 없는 목소리가 덤덤하게 이어졌다. 강의실이 술렁이는 틈을 타 뉴트가 상체를 약간 기울이고 민호의 표정을 모르는 척 말을 걸었다.
"그래서, 민호. 너는 사랑의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
"젠장, 몰라. 애초에 그걸 왜 정의해야 되는데."
역시나 민호는 탐탁잖은 기색이었다. 흐음. 그건 그래. 답하며 그를 힐끗 보자 민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민호는 어떻게 해서든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공학도가 된 그에게 사랑의 정의에 대해 써내는 레포트는 달갑지 않은 과제임이 틀림없을 만도 했다. 심지어 중간고사를 대체하는 과제라면 더더욱 그랬다. 뉴트의 손가락이 과제 공지문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뉴트는 어떤가 하면, 그는 이미 사랑의 정의에 대한 키워드를 몇 개쯤 골라둔 상태였다.
1. LOVE is love
사랑? 사랑은 사랑이지. 뉴트가 턱을 괴었다. 처음으로 꿈에 민호가 등장한 날을 떠올렸다. 뉴트는 품이 약간 큰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으면서부터 종종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뉴트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그를 누군가라고 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얼굴이 안개처럼 까맣게 흐려져 있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누구인지 모를 그가 무척 익숙하게 느껴지곤 했다. 누군가에 대한 꿈은 몹시 제 맘대로였다. 사나흘을 연달아 나타나다가도 뜸해지면 며칠씩 꿈 없는 밤이 이어졌다. 심할 때는 몇 달이나 잠잠하다가 불쑥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기도 했다. 뉴트의 꿈속에서 누군가는 얇은 셔츠 차림이기도 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벨트를 상체에 두른 모습이기도 했다. 드물게는 병원에서나 볼 법한 환자복 비슷한 것을 입고 있는 날도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물러난 것은 열일곱의 여름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날 꿈에서 뉴트는 누군가와 유난히 친밀한 모습이었다. 몇 번이나 눈을 마주하고,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꺾은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주홍빛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누군가가 무어라 말하더니 장난스레 웃었다. 가늘게 접혀 휘어지는 눈매와 깊게 패이는 볼우물이 언뜻 뉴트가 아는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누군가의 웃음에 뉴트 역시 소리 내 웃었다. 마지막 남은 나뭇가지를 던졌을 때 누군가가 뉴트의 목을 당겨 안았다. 입술이 겹치자 그가 눈을 감았다. 약간 도톰한 눈두덩 위 진한 눈썹이 확실히 뉴트가 아는 사람과 비슷한 것 같았다. 꿈인데도 혀가 얽히는 감각에 고조되는 기분이었다. 짧지 않은 키스 후 여전히 바짝 가까운 상태에서 뉴트가 누군가를 불렀다. 목소리가 달았다. ……민호.
동시에 잠에서 깬 뉴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이었고, 다를 것 없는 제 방이었다. 모닥불과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숲 따위는 모니터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인 세상. 머리를 쓸어올리는 내내 누군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웃는 민호,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는 민호, 피곤한 기색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미로에서 걸어 나오는 민호, 잠깐. 미로? 그 단어가 주는 기시감을 깨달음과 동시에 깨어질 듯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잔뜩 찡그린 뉴트가 귀를 막으며 이불을 짚었다. 마른 근육이 팽팽하게 수축했다. 휘청이는 몸을 지탱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달려, 민호. 달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다급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다행히 환청은 금방 가셨으나 그 선뜩한 느낌만은 오래도록 목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설상가상, 이튿날 민호를 마주친 순간부터 그 입술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민호가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쳐내고서야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자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미친 척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2. LOVE is memory
"…트. 뉴트. 야."
"음?"
뉴트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을 한 민호가 그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가자고. 이미 가방까지 둘러맨 민호가 뉴트를 재촉하고 있었다. 꿈에 이어 지난 기억을 상기했더니 시선이 무심코 민호의 입술을 향했다. 민호의 미간이 조금 더 깊게 그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그를 따르며 끊어진 기억을 다시 더듬었다. 누군가의 정체가 민호로 밝혀진 뒤부터 꿈은 아주 직접적이고, 사실적이고, 약간은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뉴트의 꿈에서 민호는 친구이자 동료였고 연인이었으며 구원자였다.
앞서 걷는 민호의 뒷모습에 러너 벨트가 얼핏 겹쳐 보였다. 꼬박 십삼 년을 꾸었더니 이제는 그와 자신을 관통하는 서사의 윤곽이 제법 구체적으로 잡혀 있었다. 뉴트는 제 졸업 전시회의 주제로 그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었다. 전시회 준비는 꽤 순조로웠는데, 민호가 상상 이상으로 협조적인 모델이 되어 준 덕이 컸다. 그는 강의 사이의 여유 시간은 물론이고 동이 터오는 새벽과 희미한 별빛뿐인 밤을 가리지 않고 촬영에 응했다. 뉴트는 민호의 매 순간을 담아낼 것처럼 셔터를 눌러댔다. 물론 대다수가 전시회에 쓸 것이었으나 순전히 제 욕심으로만 찍어낸 컷도 있음은 사실이었다. 작품이 착실하게 준비되는 것과 비례해 피사체로 쏟아지는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필요한 장면은 순조롭게 채워지고 있는데 갈증은 깊이를 더해만 갔다.
뉴트가 일렁이는 감정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민호는 스스로 제 손목을 매달고 기계장치에서 이어진 선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사진을 위해 꾸며진 장면임을 아는데도 카메라를 든 손이 잘게 경련했다. 어스름하게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는 창밖과 희게 빛나는 실험대, 거기 묶인 민호. 뉴트를 벼랑으로 몰아갔던 것들이 그의 눈 앞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애써 숨을 고른 뉴트가 겨우 파인더를 맞추었다. 작은 화면에 고개를 숙인 채 늘어진 민호가 담겼다. 신처럼 고요히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손이 떨렸다. 몇 번이나 카메라를 고쳐 쥐느라 셔터음이 들리지 않자 민호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뉴트? 심상찮은 상태를 알아챘는지 반듯한 눈썹이 좁혀졌다. 뉴트는 답하지 않았고, 좀 더 찌푸린 민호가 빠른 손놀림으로 거미줄 같은 전선들을 떼어냈다. 성큼성큼 다가온 민호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에 뉴트가 그 몸을 당겨 안았다. 결국 놓쳐버린 카메라가 손목에 건 스트랩에 매달려 느리게 흔들렸다. 한 박자 늦게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호."
네가 나를 구했어. 나도 너를 구하고 싶었어. 이어지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3. LOVE is,
가만히 서 있던 민호가 이윽고 팔을 들어 뉴트를 마주 안아왔다.
괜찮아? 민호가 물었고 엉망이야. 뉴트가 답했다.
엉망이야. 그치만 보니까 좋다. 힘없던 제 목소리가 어렴풋이 겹쳐져 떠올랐다. 괴물이 되기 전에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약간 실소한 뉴트가 기댄 머리를 바로 하며 민호의 시선을 곧장 마주했다.
"레포트 뭐라고 쓸지 정했어? 난 끝났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민호의 목소리 끝에 힘이 실렸으나 뉴트는 한쪽 눈썹을 조금 올렸을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 내 전부를 차지하는 거야."
"……."
"그리고 나는." 희미한 떨림이 남은 손을 뻗었다. 아주 천천히.
"내 마지막에 너를 떠올렸어." 피부에 닿은 뺨의 감촉이 익숙한 동시에 낯설었으나,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거야." 나쁘지 않았다. 그가 구해준 두 번째 생이었다.
< 성 @uhs9999 >


조금은 이른 오후, 카페에는 언제나처럼 노란 빛이 가득한 금발머리의 네가 있었다.
“뉴트, 넌 사랑의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
“뭐?”
콜록콜록. 그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차분히 뉴트가 시켜준 아메리카노를 한 입 들이켰다. 윽, 밍밍해. 커피는 이미 얼음이 녹아 밍밍해져 있었다.
“그나저나 민호.”
“응?”
“우리 과제 때문에 놀러가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어디라도 갈까?”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한 손으로 나의 손등 뼈마디를 문지르며 물어오는 너다. 넌 알까. 고작 네가 지분대는 손등의 뼈마디마저도 나는 열꽃이 머무르다 간다는 것을. 이미 밍밍해져버린 커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깃들어있었으니.
*
그를 따라 나간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집이었다. 아니, 놀러간다며? 나의 손을 잡고 이끄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멈추게 했다.
“놀러간다며?”
“밖으로 간다곤 안했지.”
그는 대답을 함과 동시에 현관문을 닿으며 짙게 입술을 맞춰왔다. 짧게 입을 맞추던 그가 이번엔 길게 입을 맞춰 왔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읍, 읍읍. 뉴트. 잠깐만. 급하게 입을 맞추던 뉴트가 제 입술을 떼며 말했다.
“왜? 사랑의 정의가 궁금하다며 민호. 오늘 하루 종일 알려줄게.”


< 시로 @siro9597 >
< 신쨩 @SHIN___S2 >

알비에게 끌려가 본부의 가장 큰 방 의자에 앉혀진 뉴트가 뚱한 얼굴로 글씨를 읽어 내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꾹 다물렸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진다. 몇 번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낸다. 알비. 묘하게 뒤틀려 있다.
알비는 너덜한 종이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었다. 곱지 않은 표정이 보인다. 알비가 한쪽 눈을 찡그린다. 오늘은 글레이드의 전체적이고 세밀한 갖가지 사실을 정리해 체크하는, 리더와 차기리더 두 사람의 정기적이고 특별한 작업의 날이다. 뉴트가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 뒷덜미를 잡힌 채 답지 않게 투덜거리던 뉴트가 떠오르지만 일하기 싫다는 투정을 용납할 만큼 글레이더의 삶은 한가하지 않다.
알비가 뉴트를 빤히 바라보며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자 뉴트가 손을 팔랑거린다. 이거 아직 다 안 읽었어. 알비가 쥐고 있던 종이는 낡아빠진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알비가 다 읽고 뉴트에게 넘기려다 만 종이가 테이블 위에 수북하다. 도대체 어디를 읽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잠자코 앉아 있는 꼴이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아무래도 다른 생각에 푹 잠겨 있는 듯했다. 알비가 종이 모서리를 만지작거린다. 그 손가락을 흘끔거리고서 뉴트가 짙게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 위로 종이 뭉텅이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알비. 이번에는 한숨 섞인 부름이다.
“부르기만 하지 말고 말을 해.”
“나 좀 이상해.”
“뭐가.”
“민호만 보면 여기가 막 뛰어.”
사실 생각만 해도 그래. 뉴트가 중앙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부근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알비는 심각한 표정과 둥글게 움직이는 손을 번갈아 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맞을까 봐 무서운 거네.”
“아, 그런가.”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일이나 마저 해.”
한참이나 고민한 것 치고는 쉽게 수긍한다. 뉴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려놓았던 종이를 다시 집어 든다. 한 시간 동안 겨우 읽었던 열두 줄을 까먹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뉴트는, 단어가 분리되어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랫입술을 비죽이며 방금 전의 대화를 짚어보던 뉴트가 다시 대화를 시도한다. 아니, 알비. 나 민호가 무서운 게 아닌데.
“닥치고 일이나 해, 뉴트.”
“알았어.”
뉴트는 얌전히 입을 다문다. 일은 한참 남았고 마무리하지 못한다면 취침 시간이 미뤄질 수도 있다. 어쩌면 저녁 식사 시간을 박탈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을 이미 꽉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기까지 하는 질문 한 가지 때문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올 여유가 없다. 누구에게 물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누군가 답이랍시고 내놓는 말에는, 차라리 그것이길 바라서 잠시 긍정했다가도 곧 의심이 들고 이내 고개를 젓는다.
어차피 종일 생각해도 답을 알아낼 수 없을 테니 일단은 일부터 마저 하기로 한다. 뉴트는 생각을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민호의 얼굴을 저편으로 밀어버리고 종이에 얼굴을 가까이……. 근데 알비, 민호 올 때 안 됐나? 닥치고 일이나 하라고. 아무리 봐도 시간 내에 할당량을 완수하기 글러먹은 모양새다.
What is love?
뉴트가 민호에게 과하게 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낀다. 다른 글레이더와 민호, 둘의 차이는 뉴트에게 큰 다름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민호에게 묻지 않아 언급된 적은 없다만 민호도 그 사실을 아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덧붙일 말은 없다. 기억하는 한에서 뉴트는 평생 민호에게 과했고 그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과하다는 말조차 붙기 어려울 만큼, 두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글레이더에게 뉴트의 태도는 익숙하면 익숙했지 이상한 일은 될 수 없다. 가끔 의아함을 느끼는 신참이 두 사람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던질 때가 있지만 쉬이 사그라든다. 뉴트는 바뀔 생각도, 바뀔 예정도 없으니 전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둘의 사이에 대해 고뇌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말로 시간낭비를 하는 데 요즘의 뉴트는 무엇보다도 일상을 많이 할애하고 있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당연한 관계를 되짚게 된 건 민호 때문이다. 뉴트는 답이 없는 숙제를 하는 것처럼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민호에게 책임을 떠넘기곤 했다. 종일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이에게 할 수 있는 건 닿지 않는 투정이 다였다. 그마저도 민호가 무슨 잘못이 있어, 하면서 해먹에 드러누워 다시금 혼자만의 고민에 빠지고 만다.
‘왜, 너 왜, 지금. 지금 와.’
‘야, 야. 왜 울어. 뉴트. 나 봐. 나 왔잖아.’
‘늦어, 서, 나 엄청……. 나는, 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나 다치지도 않았, 아니, 좀 다치긴 했는데. 어, 그러니까. 젠장, 울지 마.’
민호가 늦지만 않았어도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다. 가끔 민호가 평소 돌아오는 시간보다 늦는 날은 있었지만 그날처럼 시간이 지체된 적은 없었다. 벽 근처에서 서성이는 뉴트의 입술이 죄 뜯어져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자꾸 쓸어 넘겨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삐죽거렸다. 시선은 초조하게, 민호가 뛰어와야 할 그 길을 훑었다. 민호는 녹초가 되어서 다리를 끌면서 나타났다. 실루엣에 불과하던 몸이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오자 뉴트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쳤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치고 민호는 쉴 틈도 없이 뉴트를 달래야만 했다.
두려움과 안도가 뒤섞인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면서 울음이 잦아들면, 흐린 시선에 닿는 민호가 예뻤다. 종종 웃는 게 귀엽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예쁘다는 말이 민호를 보면서 떠오른 적 있었나? 훌쩍이는 뉴트의 뺨을 감싸 쥐고 조심히 눈물을 닦는 민호를 뉴트는 물끄러미 봤다. 민호가 미로에 삼켜지지 않고 다행히도 모습을 드러냈을 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던 심장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놀라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오늘 밤은 같이 보내야 한다고 우겨서 민호 옆에 달라붙어 잠을 청한 뒤에도 같았다. 뉴트는 꼭 병에 걸린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뭘 봐.”
“너.”
“보지 마.”
“싫어.”
민호가 질린다는 얼굴로 뉴트를 흘겨보면 뉴트는 마냥 웃는다. 호의적이지 못한 표정도 민호라서 그저 달게 보인다. 심장이 발을 구르듯 쾅쾅거리는 것에도 며칠 지나니 익숙해진다. 글레이더의 반이 넘게 상담을 요청해 봤지만 이런 기분을 느낀 사람이 아무도 없다. 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민호와 보낼 수 있는 시간마다 그 얼굴을 눈에 담는 것뿐이다.
민호가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아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가볍게 푸는 민호의 뒤로 뉴트가 바짝 다가선다. 근육이 옹골지게 들어찬 마른 팔이 민호의 허리를 둘러 안는다. 뉴트가 턱을 민호의 어깨에 댄다. 러너 벨트가 딱딱해 편하지 않을 텐데도 자세를 풀지 않는다. 민호는 익숙한 듯 옷매무새를 다듬기만 한다.
“잘 다녀와, 민호.”
“울지 말고 있어.”
“울면 달려와 줄 거야?”
“염병 좀 그만 떨어.”
민호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살짝 돌린다. 민호의 뺨만 들어섰던 시야에 입술이 잠시 잡혔다 사라진다. 뉴트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알아서 금세 얼굴을 제자리로 돌린 모양이다. 그 각도, 그 얼굴이 깊다. 찰나에 깊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혀끝이 마른 입술을 훑었다.
입 맞추고 싶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어떤 감각인지 모를,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모르는 행위다. 그럼에도 갑자기 드는 충동의 까닭을 본인도 알 수 없다. 손가락이 뉴트의 팔을 툭툭 친다. 뉴트가 느리게 팔을 푼다. 동그란 실타래가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끊이지 않고 풀려나가는 것처럼 순간 복잡해진 머릿속은 멈출 생각을 않는다.
이번에는 물어볼 곳도 없다. 민호에게 입 맞추고 싶어, 선뜻 꺼낼 수 없는 고민이다. 뉴트는 나무 밑동에게 화풀이하듯 마구 도끼질 하다가 쭈그려 앉는다. 한 곳만 파인 게 아니라, 마구 내리쳐 이곳저곳 생채기가 난 나무껍질 위를 짚는다. 굳은살이 잔뜩인 손바닥으로 거친 나뭇결이 느껴진다. 뉴트는 잠시 그곳에 온 신경을 쏟았지만 결국은 다시금 떠오르는 입술에 눈을 질끈 감고 앓는 소리를 낸다. 같이 누웠던 어젯밤도, 숲에서 농땡이를 치던 일주일 전에도 민호의 입술은 가까웠는데 왜 새삼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민호를 보지 않으면 금방 사라질 마음일까? 뉴트는 해결책을 하나 내놓았다가 몇 초 되지도 않았을 때 접어버린다. 내가 걔를 안 보고 어떻게 살아.
“야.”
“…….”
“야.”
“으응….”
“야!”
“어?”
화들짝 놀라 상체를 최대한 멀리 젖히는 뉴트를 한심해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민호가 시선을 거둔다. 조온나 쳐다보네. 웅얼거림이 뉴트에게까지 닿아서 뉴트는 멋쩍게 목을 문질렀다. 두 사람은 미로 벽에 등을 기대고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글레이드에는 밤이 찾아왔고 오늘따라 영 잠이 오지 않을 듯했다. 민호는 그래서 뉴트를 데리고 벽 근처 구석진 곳으로 향했고 뉴트는 군말 없이 민호를 따랐다. 몸은 피곤했으나 정신은 멀쩡했다. 어차피 잠들지 못할 거라면 민호를 보고 있는 게 나았다. 그런 생각이 언제나 당연했음에도 뉴트는 괜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까부터 없어지지 않는 문제점 하나. 옆에 있으니까 민호 입술 확 물어버리고 싶어서 죽겠다. 뉴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무 옆에서 헛짓거리 하다가 손이 긁히기라도 했는지 뺨에 닿는 손바닥이 따가웠다. 민호는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는 뉴트를 흘긋 쳐다보고서는, 자세를 아예 반쯤 틀어 뉴트가 제 앞이도록 한다.
“무슨 일 있어?”
“아아니.”
“네가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고 그러지.”
“넌 가끔 속아주는 법도 알아야 해.”
“무슨 일이냐니까.”
“뽀뽀해도 돼?”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라고 보기 어려운 되물음이다. 민호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끔뻑인다. 두 사람 다 말이 없다. 민호는 입 작게 벌린 채 멍청한 표정 짓고 있었다. 뉴트는 아무런 감정도 표면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속내는 민호보다 복잡했다. 뉴트는 제가 한 말을, 실수는 아니었지만, 후회하면서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구상하고 있었다. 민호가 입술을 잘근거린다. 아랫입술이 붉게 물든다. 하나, 둘, 셋, 넷. 뉴트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열까지 세고 말을 꺼내야겠다. 뉴트가 정확히 여섯까지 셌을 때 적막 속에서 쪽, 하고 낯선 소리가 났다.
“…….”
“…….”
“… 민?”
“내가 먼저 했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민호가 씩 웃었다. 흐린 초점 다잡아 보조개가 깊은 얼굴을 뚜렷이 쳐다본다. 뉴트는 입술에 느껴졌던 감각을 되새기기도 전에 급하게 민호의 뺨을 붙들고 도로 입술을 맞댄다. 떨어졌다는 사실 하나로 그 틈새가 너무 아쉬워서 뉴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맞물리지 않으면 안 된다. 떨어져 있으면 몸 전체를 쿵쿵 울려대고 있는 요란한 심장박동을 민호가 들어버릴 수도 있다. 유치한 변명거리가 입맞춤을 정당화시킨다. 민호는 뉴트를 밀어내는 대신 손등을 감싼다. 조급한 목소리가 마음에 짓눌려 낮게 가라앉는다.
“빨아도 돼?”
“씨발, 뭔…. 그렇게 물어보지 마.”
꼭 붙은 채로 소곤소곤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은 뉴트가 불쑥 민호의 입 안으로 침범했을 때 끊긴다. 당황한 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침입자를 꽉 물어버린다. 뒤로 쑥 물러나 안을 채웠던 물컹한 게 사라지면 민호가 웃어버린다. 아픔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뉴트도 어이가 없어 따라 웃는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틈새로 킥킥거리는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왜 깨물어.”
“막, 들어왔잖아.”
“혀 빨 거야. 입 벌려.”
잠시 떨어져 있던 시간마저 아쉽게 느껴져서 뉴트는 급한 감 숨기지 않고 입술을 부딪었다. 아, 하고 벌어진 입술이 귀여워 다시 웃음 터뜨릴 뻔한 걸 간신히 참고서 뉴트는 아까보다 느릿하게 민호에게 파고든다. 체온이 높은 편인 민호의 안쪽은 뜨겁게까지 느껴져서 뉴트는 작게 신음했다. 너, 너무, 좋아. 머릿속을 울리는 세 어절의 문장을 목소리로 전하지 못해 계속 혀끝만 애타게 부벼댄다. 제 옷자락을 꾹 쥐어 구겨진 것을 당기는 손가락마저 꼭꼭 씹어 삼키고 싶다. 민호에게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왜 입술을 부딪고 헤집어대고 싶은지, 며칠을 꼬박 잊지 못했던 의문이 하얗게 재가 되어 버린 마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밤은 짧았고 뉴트는 민호를 재울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기 싫다는 칭얼거림을 삼키는 대신,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려는 민호를 졸라 제 어깨에 기대게 해 거의 끌어안아 재웠다. 민호가 온전히 느껴지는 밤이었다. 뉴트는 이렇게 충족된 마음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자신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고 민호는 없었다. 뉴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몇 신지 감도 안 잡힌다. 딱히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아직은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앉아만 있으니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그 얼굴이다. 찾으러 가기에는 행방을 모르니 어디 있냐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인데 목이 잠겨 글레이드 전체에 목소리가 퍼질까 의문이다. 뉴트는 정말로 그렇게 민호를 불러낼 심산이었다. 목을 쥐고 큼큼, 두어 번 헛기침 하고서 입을 열자마자 뉴트는 입술을 닫았다. 시야에 민호가 들어온다. 눈이 휜다.
“민호.”
“잘 잤냐?”
“미로 가?”
제 질문에는 대답도 않는 뉴트를 향해 친절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민호는 뉴트의 앞으로 다가온다. 뉴트는 민호를 물끄러미 올려보다, 저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양 쭈그려 앉는 민호를 따라 시선을 내린다. 입술이 가볍게, 입가에 내려앉는다. 다녀올게. 민망한지 눈을 피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민호의 손목을 꽉 쥔다. 민호는 여전히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뉴트는 아랑곳 않고 반쯤 일어나 민호의 턱에 입술 댄다.
“다녀와.”
“놔야 가지.”
“뽀뽀 한 번 더.”
그리고서 입술이 잠시 붙었다 떨어진다. 뉴트 입술에 눌려 모양을 잃은 민호의 입술에 축축한 것이 스친다. 입술을 적시고 떨어진 뉴트가 완전히 일어나더니 민호의 허리를 감쌌다 놓는다. 조심해. 그래. 일찍 와. 그래. 두 번 다 긍정의 답을 얻어내고 나서야 뉴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민호를 보낸다.
뒤를 돌면 뉴트가 볼 수 있는 건 민호의 뒷모습뿐이다. 동그란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뉴트는 민호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미로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민호의 귀가 붉어져 있다. 민호가 눈가를 팔로 문질렀다. 마냥 좋아 웃기만 하는 뉴트와 달리, 새벽 원치 않게 잠에서 깨어난 뒤부터 뉴트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이상해서 민호는 꼭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민호.’
응.
‘잊지 마.’
뭘?
‘내가 너를…… 알려줘야……’
안 들려.
‘민, 나는……’
하나도 안 들려,
“뉴트.”
민호는 간밤의 꿈을 되새기다 작게 꿈속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뉴트와 꽤 오래 입술을 비벼대서 부르튼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잠 못 잤어? 벤이 자신의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피곤해서 부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민호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을 못 잔 것도 맞았다. 물론 입술이 이렇게 된 것에는 다른 원인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말이다.
입을 맞춘 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어제의 꿈에는 이상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 전까지는 한 번도 꿔본 적 없는, 뉴트의 꿈이다. 꿈에서 그의 얼굴은 흐릿했고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저를 감싼 채 울려대는 목소리는 조금 앳되었을 뿐 뉴트의 것이 맞았다. 뉴트는 민호에게 잊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뉴트의 목소리는 흐렸고 잡음이 섞여서 민호는 온전히 들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거냐고 답답해 소리치자마자 동시에 민호는 꿈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뉴트의 품 안 가득 안겨 있음을 알았다. 민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눈이 아팠다.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불편하게 자고 있는 뉴트를 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가에 열이 몰렸다. 민호는 뉴트의 목에 뺨을 부볐다. 눈물을 삼켰다.
“민호 어디 있어?”
“맵실. 할 일 있다고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데?”
민호는 뉴트를 피했다. 러너들에게 거짓말을 치면서 맵실에 숨었다. 뉴트의 얼굴을 보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미로 안에서 뉴트를 떠올릴 때마다 비어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질 것 같아서 민호는 맵실에 틀어박혀 종이를 뒤적거렸다. 왜 이상한 꿈을 꿔서. 그 꿈의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민호는 뉴트의 얼굴을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민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사이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눈을 감는다. 뉴트의 얼굴을 그린다. 뉴트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민호.’
또 그 꿈이다. 꿈의 시작을 알리는 부름이다. 민호는 자신이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음을 알았다. 파랗게 물든 주변에는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 잘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그래서 그저 뉴트의 얼굴에 집중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잊지 마.’
손을 뻗었다. 뉴트는 잡히지 않았다. 연기처럼, 손아귀에 들어차는 순간 흩어진다. 이번에는 뉴트가 손을 뻗는다. 뉴트가 민호의 뺨에 손을 댄다. 손을 댄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닿을 수 없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참 애달프다.
‘내가 너를 보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야.’
또렷하다. 뭉그러지던 발음이 반듯이 펴져 민호에게로 스며든다. 사랑이 뭔데? 민호는 입을 벙긋거린다.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잊어도 네가 알려줘야 해.’
잊지 마, 민호. 사랑해. 내가 널, 아주 많이.
깨어난다. 뺨이 축축하다. 잠들었던 자세 그대로 깨어난 민호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른다. 손바닥이 젖어든다. 울었나 봐. 중얼거리고서 민호는 맵실을 박차고 나선다. 불편한 자세로 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무작정 걷는다. 해가 저물 기미 보이기도 전에 맵실에 처박혔는데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뉴트도 잠들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깨어 있을 거라고 민호는 믿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몇 걸음에 한 번씩 비틀거렸지만 민호는 꿋꿋하게 발 닿는 곳으로 향한다. 뉴트가 왠지 있을 것 같은 곳. 민호는 어제 두 사람이 밤을 보냈던 벽 쪽으로 걸어가다가 글레이드 한복판에서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뉴트를 본다. 민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꾸역꾸역 삼키던 울음이 밀려나온다. 뉴트, 하고 부르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민호는 뉴트에게로 간다. 걸음이 빨라진다.
“… 민호?”
무작정 안겨드는 몸을 뉴트는 반사적으로 끌어안는다. 훌쩍임이 들린다. 뉴트가 눈 동그랗게 뜨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이유는 몰라도 뉴트는 그저 민호가 울기 때문에 당연하게 위로부터 건넨다. 말을 대신한 위로였다. 민호가 우는 걸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래서 뉴트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민호가 우는 게 아팠다. 뉴트는 도리어 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민호의 등을 토닥였다. 손이 떨렸다. 울지 마. 간신히 뱉은 속삭임에도 민호는 흐느낀다.
“뉴트. 뉴, 트.”
“응, 나 여기 있어.”
뉴트가 없으면 픽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기대 있던 민호가 홀로 설 수 있도록 뉴트는 민호의 팔을 잡아준다. 민호는 손등으로 눈을 마구 문지르면서 몸을 바로 세운다. 뉴트가 민호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는 뺨을 감싼다. 왜 울어. 다정한 물음에 민호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사랑이 뭐야?”
덜컥 내려앉는다. 무엇인지 모를 게 울렁거리다가 밑으로 툭 떨어진다. 뉴트는 민호와 시선을 맞춘다. 발간 눈이 가만히 뉴트를 본다.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다 뉴트의 손가락에 막힌다. 뉴트가 조심히 눈물을 걷어낸다. 뉴트는 잠시 생각한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뉴트가 할 말은 하나뿐이다. 입술이 벌어진다. 상냥한 시선은 언제나처럼, 민호에게서 벗어날 것 같지 않다.
“네가 할래?”
“뭘, 뭐를.”
“사랑. 네가 해, 민호.”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게 무슨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볼 때 그래. 너 보면 그래. 사랑이랑 민호가 똑같은 말인가 봐. 뉴트가 고개를 숙인다. 코끝이 닿는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뉴트가 희미하게 웃는다. 당겨 올라간 입술의 끝에 민호가 입을 맞춘다. 젖은 입술을 눈을 감고 받아들인다.
뉴트는 오랜 고민의 끝을 낸다. 민호를 보면, 민호를 생각하면 느껴지는 모든 감정의 이름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한다. 사랑이 너고, 네가 사랑이야. 맞붙은 입술이 전하는 마음은 꿈결 따위 금세 잊게 만든다. 구멍이 잔뜩 뚫린 미완성의 사전에 새로운 단어가 적힌다. 나에게 사랑의 정의는 너다. 이 밤에 남을 문장은 그뿐이다.



< 아스펠리언 @camael120 >


뉴트, 난 널 죽어서도 잊지 않을 거야. 아니, 죽어서라면 우린 재회를 하고 있겠지? 영원히 20대인 너와 추레하게 늙어버린 볼품 없는 모습의 나로. 혹시 그거 알아? 봄만 되면 여기 세이프헤이븐을 하얀 홀씨로 뒤덮어버리는 이유는 만개하지 못하고 저버린 네가 서글픈 것인지 자신을 닮은 그 녀석을 잊지 말라 발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해.
민들레에는 행복이라는 뜻이 있대. 널 닮은 황금같이 빛나는 노란 꽃. 너는 내게 행복이었으니까. 행복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조금 힘겹기도 하네. 약한 소리 해서 미안해. 네가 없는 삶을 그려본 적도 없고 사실 아직도 네가 “민호” 라며 내 이름을 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들리거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를 해바라기에 투영시키기도 하지. 널 끝없이 기다리며 숭배하는 너의 신실한 신도. 어쩌면 넌 고작 꽃 따위에 스스로를 투영시키는 내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널 닮은 노란 꽃들만 보면 네가 생각나고 미처 손쓸 틈도 없이 그런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내 사고를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이번 봄에는 네 육신이 쉬고 있는 곳에 망종화를 심어볼까 해. 꽃, 잎, 줄기, 열매 전부 약재로 쓰인다고 하네.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어. 망종화의 꽃말은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야. 네가 꽃말에 신경을 쓰냐고 웃음을 터뜨릴 네가 눈에 선하네. 하지만 웃지 말아줬으면 해. 널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나만의 다짐이니까. 벌써 노을이 지려 하고 있네. 이만 줄일게. 다음에 또 편지할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안녕, 뉴트.
어느 겨울날 너의 민호


< 유흔 @All_of_1 >


Your Name
정수리가 뜨끈한 것 같아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또 집요하게 보고만 있지. 한숨을 내쉬며 책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만 보라는 무언의 의사표시에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어쩌자고 자꾸 그렇게 보는지 이유를 알아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저 눈길에 질식할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우는소리를 한다. 물론 뉴트가 듣지 못하니 울음은 민호만 삼키는 답답함이다.
언제고 어느 때이고 쫓아오는 뉴트가 익숙할 법도 했는데 도저히 적응하질 못했다. 누군가의 관심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가. 알 수는 없어도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편했어도 제지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다만 이렇게 오래 쫓아올 줄은 몰랐지.
괜히 더워져서 손부채질을 했다. 뉴트의 눈빛에 타버릴 것 같았다. 헐벗겨져 온몸이 끈적하게 핥아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뜨겁고 간지러웠다. 고작 눈빛에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뉴트의 까만 눈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친구로 지낸지 8년, 그 위에 한 겹 더 쌓은 관계로도 1년을 더 알았다. 곧 있으면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되어 가는데 그 긴 시간을 알았어도 뉴트가 만들어낸 눈빛에는 익숙해질 것 같진 않다.
"민호."
"왜."
"그냥."
빤히 바라보다가 기껏 호명하곤 아무런 말도 없다. 뉴트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민. 민호. 끊임없이 불렀다. 들러붙는 시선만큼이나 꾸준한 부름이다. 왜 부르냐 물으면 실없이 그냥. 좋아서. 하고 답한다. 네가 내 부름에 응답하는 게. 미처 입 밖으로 뱉지 않은 말이 귀를 때리는 것 같다.
처음엔 그 부름도 못 견디게 간지럽더니 씹어 삼킬 듯한 시선보다는 이름을 불러 돌이켜 세우는 게 조금 더 나았다. 울림은 부드러웠고 따뜻했기에 실없는 부름이라도 용인할 수 있기도 했고. 언젠가는 뉴트의 부름처럼 눈길에도 익숙해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민호가 호명에 익숙해진 시간만큼 지나고 나면.
마음을 자각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민호 자신도 확신이 없었고 뉴트의 생각을 알지도 못했다. 어느 순간인가 마음속 깊은 곳에 파고든 그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눈매를 곱게 접어 입꼬리를 길게 밀어 올린 채 웃는 그 얼굴에 심장이 쿵, 떨어져 몇 번이나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머리꼭지에 도달했을 때 알았다. 우정을 착각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고 부정하고 제 감정에조차 자신이 없었다.
꿈을 꾸면 뉴트가 나왔다. 웃기도 했고 민호의 여러 가지 가정 속에서 가장 최악을 말하기도 했다. 그와 입 맞추는 상상을 했을 때에서야 인정했다. 우정 따위로 헷갈릴 감정이 아니란 걸. 단순한 애정의 차이가 아니란 걸. 민호는 그제야 뉴트를 받아들였다.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길었다. 얼굴을 보면 떨려서 피하고 눈치만 보기를 며칠, 몇 달, 그렇게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뉴트가 민호를 불렀다. 그저 이름 두 글자.
"민호."
지금처럼 딱 두 글자만. 배운 말이라곤 민호가 전부인 사람처럼 불렀다. 지금에야 그 의미를 안다. 어느 순간인가 깨달았다. 뉴트가 이름을 부를 때의 눈빛이 하는 언어와 음성에 담긴 감정과 닿은 손길의 떨림이 알려주더라. 왜 몰랐을까 싶을 만큼 절절하게.
사랑이라 말하지 않을 걸 안다. 이름에 사랑을 담아서 부를 줄도 몰랐다. 민호조차 길을 잃고 헤맸지만 찾아왔다. 뉴트가 흘려놓은 돌조각들로. 노골적이었는데 달빛이 비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으니 몰랐다. 무지에 자책이 인다. 더불어 뉴트에 대한 괘씸함도 있었다. 이름만 부르면 어떻게 알아. 속상함에 투덜거려보기도 했다.
결국은 돌고 돌아서 손을 맞잡았다. 민호의 의지로.
"야. 뉴트."
"응. 응, 민호."
까만 눈동자가 일렁인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빛인 줄 알았던 눈은 오롯이 민호만을 향해 햇살처럼 빛났다. 누구에게나, 가 아니라 민호였기 때문에. 민호가 있었으니까. 앞만 보기에도 바빠서 옆을 돌아보지 않아서 늦게 알았다. 열렬히 속삭이고 있었는데 의미를 깨닫지 못해서 늦었다.
흔한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말하는 멋진 고백은 없었다. 밋밋하게 스쳐 지나갈 법한 멋대가리 없는 고해.
"한 번만 말할 거야. 뉴트. 내가."
"..."
"너를"
숨을 멈추고 굳은 얼굴을,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봤다. 숙제 검사를 맡는 어린아이처럼 떨렸다. 무슨 정신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울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에도 급급해서 기억이 선명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뉴트의 얼굴, 그 표정은 선명했다. 빛을 품으면 짙은 갈색으로 포근하게 감기는 눈동자 속에 민호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만 비교적 또렷하게 남았다.
"사랑해."
민호의 목소리보다 뉴트가 빨랐다. 곧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진실을 말한다. 눈으로 끈질기게 속삭이던 그것을, 이름으로 부르던 마음을.
그가 쏘아 보낸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온몸을 적셨다. 가랑비 따위가 아니라 장마철 폭우다. 폭삭 젖어 다른 사고는 할 수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뉴트 그가 전부였다. 그에게 푹하고 잠긴 것 같았다.
이제는 안다. 뉴트의 부름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다. 이름에 사랑을 고백했다. 눈으로 진심을 표현했다. 잡은 손의 온기가 존재를 드러내고 이따금 맞닿는 입술 너머로 내일을 약속했다.
표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같이 발을 내디딜 뿐이다. 종착점이 같았다. 그거면 되었다. 눈을 어지럽게 현혹하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서로의 부름에 이끌려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민호의 곁에는 뉴트가 있고, 뉴트의 옆에는 민호가 있다는 사실. 그게 전부인데 다른 뭐가 필요할까.
말로 뱉는 행위에 힘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미처 고하지 못한 말은 이름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의 부름은 단순히 주의를 환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많은 의미를 가졌기에 사랑을 입술로 뱉을 필요가 없었다. 더 많이 부르고 더 많이 들을 수 있는 우리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오늘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하는, 너의 이름에 온 마음을 담아 사랑을 고백한다.
민호.
내가 너를, 사랑해.




민호가 미로에서 눈을 다쳐 왔다.
가히 처참한 꼴이었다. 양 눈을 가로질러 길고 선명한 자상이 남아 있었다. 상처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고, 민호를 부축해 들어오는 러너의 얼굴은 시허옇게 질려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미로 앞에서 둘을 기다리던 글레이더들이 허둥지둥 민호를 의무실로 부축해 들어갔다. 고통을 참으려 어금니를 힘껏 짓씹은 민호의 턱이 억세게 다물려 있었다.
아무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몇 번을 물어도 민호는 입을 꽉 닫은 채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알비가 민호와 함께 있었던 러너를 추궁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 명은 쇼크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한 명은 당사자면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뉴트가 짙은 한숨을 쉬었다.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의무실에 들어선 뉴트가 눈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죽은 듯 누워 있는 민호를 내려다봤다. 의자를 끌어와 민호의 머리맡에 앉아서는 그의 얼굴만을 물끄럼 바라보기를 몇 분이었다. 붕대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붕대를 갈아 끼울 때가 된 것 같은데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듯했다. 정적을 깨고 뉴트가 입을 열었다.
"왜 자는 척해?"
그 말이 나오자마자 민호가 못 이기겠다는 듯 비죽 짧게 웃었다. "넌 줄 모르고." "거짓말." "그래. 아파서 그랬다." 따위의 대화가 가볍게 이어졌다. 무슨 일이었느냐고 구태여 다시 묻지 않았다.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해서였다.
"위키드에서 쪽지가 올라왔어."
"뭐라던."
"네 눈과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약을 보내 주겠다고 하던데."
"이미 날아가버린 눈깔도 만들어 준대? 대단하네."
"위키드잖아."
못 하는 게 없겠지. 말을 잇는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뉴트의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이 없던 민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안 보여. 기분이 이상해. 그 소리에 뉴트가 팔을 뻗어 민호의 붕대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민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아픈 건 잠깐일 거야, 하고 민호를 위로하려던 뉴트의 가슴께 깊은 곳에서 이상한 기분이 치솟았다. 무슨 느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뉴트가 미간을 구기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한 번도 너를 못 보고 있던 적이 없었는데. 앞이 안 보이니까 너한테 엄청 의지하게 된다. 네 목소리랑, 발걸음 소리……. 다른 사람이랑 너를 구분하려고 애쓰게 돼."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치밀던 감정의 정체를 눈치챈 뉴트가 자조하듯 웃었다. 소리 없이 입매로만 떠오른 미소였으니 민호가 알아차렸을 리 없는데도 급하게 표정을 지웠다. 딱히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짧게 앓는 소리를 한 민호가 자세를 고쳐 누웠다. 아프니까 자꾸 졸리다. 좀 더 잘게. 나가도 돼. 민호가 그러기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뉴트가 알겠어, 하고 부러 답을 덧붙였다.
앞을 보지 못하는 너는 다른 것들을 보는 대신 내게 더 집중한다. 나를 다른 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온 청각을 집중하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한쪽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하며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뉴트가 조용히 의무실을 떴다. 발걸음이 숲으로 향했다.
위키드에서 약을 보내 줄 거라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다. 처음에는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민호의 앞에 서니 되는 대로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거였다. 뉴트의 시선이 그의 손 안으로 박혔다. 푸른 액체가 담긴 작고, 투명한 유리관이 쥐여져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했던 거짓말이었나. 설핏 웃었다.
민호가 미로를 뛰러 나간 직후 상자가 올라왔다. 이 작은 혈청 하나만이 덜렁 놓인 채였다. 민호의 이름이 종이로 적혀 붙어 있었다. 모두가 영문을 몰랐다. 민호의 이름이 붙은 걸 보면 민호에게 써야 하는 물건인 모양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미로에서 돌아오면 물어 보자는 결론이 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위키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숲 깊은 곳으로 들어온 뉴트가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손 안에 쥔 것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뉴트가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팔뚝에 힘줄이 설 정도로 꽉 힘을 주자, 얇은 유리관이 그대로 깨지며 안에 든 액체와 함께 숲 바닥에 엉망으로 흘러 떨어졌다.
울컥하고 치솟던 그 감정은 소유욕이었다.
방금 스스로 깨 버린 유리관과 닮은 병은 의무실을 뒤지면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물과 다른 약품을 적당히 섞으면 푸른색도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다. 내일이면 민호는 위키드에서 주었다던 약품을 붕대 위에 뿌린 뒤 낫기만을 기다리게 되겠지만, 이미 잃은 눈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키드는 역시 못 믿을 놈들이라고 화를 내면 그만이겠지. 그 다음부터 너는, 다른 놈들을 시야에 담는 일도, 내게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일도 없어질 테다.
치프 러너를 새로 뽑아야 하게 되겠지. 애석한 민호. 네 뒤는 누가 잇게 될까. 사실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나는 이 미로 안에 갇혀 죽게 돼도 상관 없어. 그 때도 나만을 찾고, 내게만 집중하는 너와 함께 있을 테니까.
숲에서 걸어나온 뉴트가 글레이드의 한구석에서 일하고 있던 농작물 팀으로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시선이 의무실 쪽으로 가닿았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네게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한다고 했었지. 웃음이 났다.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질척하고, 더럽고, 퀘퀘한, 가장 바닥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사랑해. 이게 사랑일 리가 없는데, 이걸 사랑이라고 명명하지 않으면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게 된다.
여전히 네가 누워 자고 있을 의무실을 보며, 잘 자, 내일 보자, 하고 중얼거린다. 그래. 내일 만나자. 내일의 너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 이레 @7thdayof >


기억의 시작에 네가 있다. 미로에서 돌아오면 네가 담담한 척 어깨에 올리는 손의 무게가 좋았다. 출구 없는 미로를 달린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눈을 감고도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거짓된 희망의 무게란, 홀로 생각을 반추하고 있던 내 곁에 네가 다가와 앉았다. "어떤 생각 하면서 달려?" 나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시선을 굴리며 양손을 깍지꼈다, 매만졌다, 접었다, 폈다. 반응을 지켜보던 네가 입매를 올리며 자신을 탓했다. 하긴, 생각하면서 달린다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네 생각."
정의도 명예도 아닌, 네가 속한 곳의 안정과 달려 돌아온 곳에 있을 너를 위해 달린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너의 손을 잡아보았다. 말랐구나. 좋았다. 잡은 손을 단단히 고정하자 네가 웃었다. "왜 웃어." "그냥." 손끝에 간질거리는 네 감촉이 생각을 어루만진다. 툭 기대본다. 기댄 것은 나인데 내 어깨가 더 무거워진다. 눈을 감고 있으면 빗처럼 세워진 손길이 머리칼에 파고든다. 그 손길이 빗겨주는 것은 생각이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면 네 다리가 보인다. 발끝으로 툭 건드려본다. "괜찮아." 묻지도 않았는데 네가 답한다. 모두가 아는 바람이 불어온다. 네 손길이 멈춘다. "벤." 가자. 미로의 입구에 설 때 항상 마지막으로 너를 본다. 다녀와 민호.


< 터랙 @NMteraek >


뉴트민호, 기만적인 사랑을 위한 작은 발돋움
판도라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나날이었다. 눈을 떠 보니 글레이드 안 이었고, 매일을 그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나날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글레이드로 들어오기 이전의 기억이 말끔하게 지워진 소년들은 코끼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새롭게 써내려 갈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의 정의(定義)는 글레이드 만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글레이드의 소년들에게 술은 언제나 형편없고 맛없는, 그러나 기분만은 그럭저럭 좋게 만들어주는 물건이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미로로부터 돌아오지 못 하는 것 혹은 그리버에 물린 채로 미로로 돌려보내지는 것이었고 그들에게 장례란 엄숙한 심정으로, 죽은 소년이 스스로 새긴 이름 위에 선을 길게 하나 쭉 그어내는 것이었다. 글레이드는 소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로운 사회화의 장이 되었다. 누가 봐도 인공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 속에서 소년들은, 글레이드로 보내지기 전의 모든 기억이 삭제된 소년들은 그렇게 세상을 다시 써내려 갔다.
그리하여 글레이드 속에서 꾸준히 자라난 뉴트에게도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간이 닥쳐버린 것이다. 뉴트는 뱃속에서 난리를 치는 나비들을 새롭게 정의해야 했다. 뉴트는 어쩌다 두 눈 속의 사과가 그 애가 된 건지도 정의해야 했다. 뉴트는 그 애를 볼 때마다 괴로울 정도로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애, 미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러너들을 이끌고 들어갔다가 그 애들 대부분을 안전하게 다시 데리고 오는 양떼들의 목자, 민호. 묵묵하게 언제나 모두의 앞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적절한 때에 섞는 유머로 모두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설득력을 가진 진중한 얼굴과 목소리에 기꺼이 의견을 따르게 하는 타고난 리더. 뉴트는 그런 민호의 앞에 설 때면 뱃속에서 수많은 나비가 날뛰었고 눈 속의 사과가 튀어나왔으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뭔지 모를 감정이었다.
뉴트는 땅을 좀 더 세게 내리쳤다. 민호의 얼굴이 멀건 땅 위로 올라왔다 사라 졌다를 반복했다. 민호. 바보 같은 놈. 글레이드의 다른 모두에게 비밀로 한 사건이 함께 올라왔다 사라졌다. 민호. 멍청한 놈. 별다른 이유도 묻지 않은 채로 그저 묵묵히 자신을 업고 글레이드로 돌아온 민호에게 뉴트는 단 한 번 이유를 물었었다. 그 때 왜 다른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살렸냐고, 내가 죽고 싶어한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았냐고. 민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런 게 궁금한 걸 보니까 살아나긴 살아났나보지, 똘추야. 뉴트는 그게 민호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민호는 항상 일정하지 않은 시간에 돌아왔다. 미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판단은 전적으로 치프 러너인 민호의 몫이었고, 러너들이 거기에 반기를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절한 시간대에, 적절한 이유와 새로운 정보들과 함께 민호는 반드시 돌아왔다. 어떤 날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고 어떤 날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고 어떤 때에는 글레이드의 중앙에 꽂아 놓은 나무 막대기의 그림자가 가장 짧은 때에 돌아왔다. 뉴트가 가장 조급해지는 날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는 언제나 러너 팀 사이에서 무언가 일어난 날이었으므로. 다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뉴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각 팀의 팀장들만 모이는 늦은 시각 회의에서 민호는 그 날의 수확이나 손실을 짧게 알려주었지만 러너 팀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7일에 한 번 있는 알비와 뉴트, 민호 셋 만의 회의 시간이 되어서야 그 애들이 어떤 불만을 토로했는지를 간략하게 전했는데, 대부분은 매일 목숨을 걸고 달려 나가는 러너 중 몇몇이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트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보고였다. 뉴트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미로에 정말로 출구가 있는 것이냐는 식의 의문에서 출발하는 녀석들의 동요를 민호가 어떻게 잠재우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한 때 민호의 옆에서 달릴 때에 뉴트는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기에 그런 때에 민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그려볼 수 조차 없었다. 미지의 순간으로 영원히 남기고 궁금해 할 뿐이었다.
뱃속에서 요동치는 나비 떼와 눈 속에 깊이 박힌 사과 두 알과 언제나 민호의 앞에서 부족해지는 호흡이 이 궁금증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몰랐다. 뉴트는 그렇게 추측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러너 팀이 미로 속에서 글레이드로, 누추하고 남루하고 초라한 그들의 아늑한 집으로 돌아왔다. 뉴트가 막 밭 근처의 울타리를 모조리 손 본 뒤였다. 열을 맞춰, 그리고 호흡을 맞춰 뛰어오는 러너들의 뒤섞인 워커 소리로부터 뉴트는 민호의 발소리 만을 정확하게 골라낼 수 있었다. 가장 강인한 힘으로 쿵, 쿵, 쿵. 그러나 오늘따라 민호의 발소리가 축축 늘어졌다. 원래의 리듬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임이 분명했다. 손에 쥔 마체테가 따라서 축 늘어지는 것을 꾹 참으며 뉴트가 뒤돌았다.
“일찍 돌아왔네.”
“벤이 두통을 호소해서.”
그러나 두통치고는 모두의 얼굴이 지나치게 어두웠다. 뉴트가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민호는 가슴을 지나가게 맨 벨트를 추켜올릴 뿐이었다. 말하기 싫으시다 이거지. 뉴트는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병동 침대는 넘쳐나니까, 적당히 대꾸해주며 뉴트는 이미 다 고친 울타리에 다시 집중하는 척 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민호와 러너 팀 모두가 사라진 뒤였다. 뉴트는 괜히 혀를 차고는 마체테를 칼집에 다시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저녁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못 했다. 다만 신참이 한 명 더 빌어먹을 그레이드 속으로 던져졌다. 늘상 그랬듯 알비는 신참을 적당히 달래고 적당히 겁줬고 신참은 적당히 무리의 구석에 수그러들어서는 낑겨 있었다. 알비는 씩 웃었고 저녁으로는 그럴 싸한 것들을 하자고 말했다. 신참이 올라온 날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애를 위한 파이어 캠프가 한창인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뉴트는 갤리의 엉망진창인 술을 입에 머금고 소년들의 사이를 능숙하게 지나다녔다. 민호는, 평소 같았더라면 러너 팀과 함께 시시덕거리고 있었을 민호는 그로서는 기이하게도 조용하게 입을 다물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파이어 캠프의 중앙에서 어느덧 끼어들어서는 떠들고 있는 신참이 평소의 민호 같았고, 구석에서 가만히 혼자 있는 민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신참같았다.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소년들에게 대꾸를 하며 뉴트가 민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민호는 뉴트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땅으로 머리를 박았다. 민호답지 않은 일이었다.
“치프, 어디 아파?”
“…아픈 건 내가 아니라 벤이야.”
“너도 아파 보이는데.”
“….”
“좀 걸을래?”
갤리의 역겹도록 맛 없는 술을 주위 아무 녀석에게나 넘기고 뉴트가 선뜻 일어났다. 턱짓으로 글레이드의 숲을 가리키자 민호가 순순히 따라 일어났다. 캠프 파이어는 절정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즐거울 일이 많지 않은 소년들은 죄다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숲에는 그리하여 민호와 뉴트 둘 뿐이었다. 낮에도 다들 이 쪽으로는 좀처럼 오려고 하지 않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기심으로 길을 나섰다가 겪은 수많은 소년들의 불행이 글레이더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은 글레이더에게 중요한 감정이 아니었다. 현재에 집중하고, 오늘을 살아남을 것. 그건 그 애들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벤이 아까 멱살을 잡았어. 내 멱살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녀석이었는데. 따로 흩어졌다가 만나기로 했거든. 단 둘만 있어서 그랬는지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나봐. 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거짓말을 했어. 아직 우리가 미로의 모든 구역을 아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낼 거라고. 내가, 내가 너희 모두를 이 밖으로 데리고 나갈 거라고. 그 때까지만 날 믿어달라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벤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러는 거야. 씨발, 그래서 민호 네가 이 긴 시간 동안 뭐 좆 같은 거라도 찾아냈냐고! 왈칵 화를 내는데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걔 눈을 보고 그랬어. 벤. 하고 부르니까 고개를 돌리더라. 벤. 하고 다시 부르니까 그제서야 날 바라보는데 욱해서는 소리 질러 놓고 자기도 놀란 눈치였어. 그래서 내가 벤한테 그랬거든. 나 믿어. 내가 반드시 널 미로 밖으로 데리고 나갈게. 미안해, 지금까지도 전부 알아내지 못해서. 그러니까 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 질러서 미안해 민호 그러는 거야.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고생하는데, 미안해 민호.”
“….”
민호는 단 둘만이 남자 뉴트에게 거리낌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터벅거리는 발걸음이 미로에서 돌아오는 순간보다도 지친 것만 같은 소리라 뉴트는 찬찬히 민호의 말들을 소화하려 애를 썼다.
“미안한 건 나지. 이 미로에 출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민호.”
“….”
민호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뉴트는 민호를 다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대체, 씨발, 헛짓거리 외에 뭐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아 뉴트?”
“….”
“나를 봐, 뉴트. 매일 걔네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어. 저 좆 같은 미로 밖에는 좆도 없다는 걸 알면서! 매일같이 걔네를 그리버가 득시글거리는 미로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민호가 씨근덕거렸다. 맵실로부터 딱 스무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민호가 자리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뉴트는 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민호가 그랬다.
“매일 죄책감을 느껴, 뉴트. 난 쟤네를 속이고 있는 거야. 알비의 말에는 동의해. 글레이드에서 살아남으려면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만 뉴트, 난 러너 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어. 뻣뻣하게 모가지 들고 있어보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뉴트는 글레이드 안의 모든 소년들을 다독이고 하나로 만들어주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호에게만큼은 그러지를 못했다. 간단한 논리기는 했다. 뉴트 스스로가 민호에게서 수많은 위안과 위로를 얻고 있었으므로. 그토록 단단하고 건강한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데 뉴트는 문득 뱃속의 나비떼가 눈치도 없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민호에게 입맞춰, 그러면 민호의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런 생각이 근거도 없이 밀려왔다. 어떻게 민호를 위로할지 몰라서 뉴트는 초조했다.
“민.”
“….”
“나 좀 봐주라.”
민호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힘이 잔뜩 빠진 얼굴을 이제 갓 돋아난 새싹을 어루어 만지듯 조심스럽게 감싸고 뉴트가 민호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 이걸로 내가 대신 받은 거야.”
얼굴이 말도 안 되게 빨개진 민호에게 뉴트가 속삭였다. 입을 맞추느라 잔뜩 굽힌 허리가 다소 아팠지만 뉴트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다시 민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 만이 닿은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앞을 보고 달려. 벤이고 기만이고 거짓말이고 죄책감이고 다 잊어. 잊었는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 건데, 미로 속으로 너희를 떠민 건 나랑 알비니까. 그래서 네 고민 내가 다시 받아가는 거야. 나한테 있어야 할 것들이니까.”
“똘추새끼가…. 너 지금 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
“입맞췄잖아, 민호. 내가 너한테.”
“미친…새끼가….”
“내가 받고 싶어, 네 고민. 그러니까 이번엔 입 좀 열어봐.”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다시 들이밀자 민호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입술을 활짝 열었다. 이번에는 혀가 오고 갔다. 나비 떼가 만족스럽게 그르렁거렸다. 그르렁? 나비 떼가?
“전부 받았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민호가 입술 위로 자신의 팔뚝을 얹었다. 귀까지 불타고 있어서 뉴트는 다시 속삭였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믿고 걔네한테 거짓말 해. 내가 네 거짓말의 죄까지 다 받을 거니까.
“그건 싫어.”
“뭐?”
이번엔 민호가 벌떡 일어나서 뉴트의 입술로 돌진해왔다.
“그런 건 싫다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런 짓 안 해. 그냥…그냥….”
민호는 말을 잇지 못 했고, 이번엔 뉴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눈동자에서 튀어나온 새빨간 사과가 민호의 뺨과 뉴트의 뺨에 깊게도 새겨져 있었다. 민호가 진짜 부끄럽다, 이거, 하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조금 전보다도 더 강하게 그르렁거리는 나비 떼를 달래기 위해 뉴트가 성큼 다가서서 다시 키스했다. 이건 키스였고, 뉴트는 그 모든 나비 떼와 사과와 호흡의 이유를 정확하게 정의했다. 밖에서도 똑 같은 말로 정의할지는 미지수였으나, 지금 여기 글레이드 안에서는 개개의 소년이 직접 내린 정의만이 유효했으므로 뉴트는 이게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입맞춤이 깊어졌고 마침내 저 멀리서 들리는 즐거운 소년들의 목소리가 더없이 커졌을 때에야 둘은 떨어졌다. 입맞춤 소리 외의 말을 두 사람은 주고 받지 않았다. 두 사람 식의 사랑이었다.


< 판도라 @bs_pandora >


< 偕日 @H431L >

ㅡ민호.
ㅡ응?
ㅡ너를 민호 해.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너무 초라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무한하게 솟는 감정에 비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와 그 어떤 형용사도, 지독하게 끓는 열망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사랑과 가장 사랑하는 것의 이름을 치환하는 방법을 처음 떠올린 사람은 얼마나 심성이 가냘픈 시인이고 영리한 인간이었을까. 처음 사랑 대신 그 자리에 너의 이름을 집어넣은 순간, 나는 비로소 문장이 완전해지는 것을 느꼈지. 민호, 그 두 글자로 미치게 완벽해지는 세계.
상념에 깊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랑인 너의 이름에 대해.
민. 첫소리를 낼 때, 떠올리는 것조차 웃음이 되는 일.
ㅁㅡ, 꼬리를 함뿍 끌어올리며 입술을 닫는 묵음의 미소.
ㅡ민, 윗니가 살짝 보이도록 아랫입술을 내리며 숨을 토하면, 혀끝이 앞니 뒤에 가 닿는 과정.
ㅎㅡ, 목 안쪽에서부터 그득히 애정을 그러모아 숨을 뱉을 동안,
ㅡ호, 둥글게 말린 입술이 키스의 신호처럼 조그만 구멍을 만드는,
영원히 닫히지 않으므로 나를 영원히 침묵하지 않게 하는, 그 완벽한 이름에 대해.
이후 나의 이름을 부르는 너에 대해 상념에 잠긴다.
ㄴㅡ, 네 혀가 잇새에 약하게 깨물린다. 붉은 혀가 희고 딱딱한 이 사이에 말캉하게 씹히는 느낌을 상상하면 내 것이 아닌데도, 씨발, 흥분하고 만다 목 안에서 은, 하고 끌려 나오는 숨은 또 어떠한가 그 소리가 꼭 신음 같이 들리면 미치게 야하다 모음을 뱉기 전까지 그건 목 안에서 도는 가르랑거리는 소리와 닮았다 목 긁는 소리를 내며 살짝 고개를 들게 되는, 로마자로는 N이 되며 혀끝이 살짝 말리는 야한 모습을 상상하고 나는 또 스스로의 인내심을 끊임없이 시험하는데,
ㅡ뉴, N-E-W, 자음이 완전한 모음과 맞물려 터져 나온다 앓는 소리가 언어가 되어 내 이름의 첫 자를 부르는 순간 둥글게 말리며 휘파람을 불 듯 오므라든 입술, 입술,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고 만지고 싶고 잔뜩 빨고 싶고 더럽히고 싶어 모든 순간에 경이를 느끼는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잘못 되었다면 차라리 앞으로도 이따위로 살겠노라 속삭이는 밤, 너의 동그란 입술, 외설스럽게 얽히는 입술의 주름 아래로 깊이 꺼지는 혀끝과 목구멍을 막으며 볼록하게 솟아오르는 후설 모조리 삼키고 싶은 그따위 것들을 상상하면서,
ㅌㅡ, 다시 혀끝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모양 뒤집어진 혓바닥 아래의 선홍색 근육 붉고 푸른 약간의 핏줄 침에 젖어 번들거리는 촉촉하고 말랑한 부분 그림자 진 잇새로 살짝 보이면 혀가 아파 눈물이 맺힐 정도로 깨물고 싶다 T,가 되기 전의 내 이름의 묵음 둥글게 말리는 혀 읏, 에 가까이 숨을 막는 소리 이어지는,
ㅡ트, 나비의 날갯짓처럼 입술이 떨려오는 황홀한 파열음. 나의 이름을 하나씩 발음하는 동안 너의 입술은 벌어지고 오므라들기 반복한다 너의 이름은 입을 다문 미소로 시작해 처절하게 숨을 토하며 입술을 오므리고, 나의 이름은 목을 울리는 비음에서 시작해 강제적으로 실낱같은 미소를 띠며 토하는 치음, 파찰음, 거치른 욕망을 닮아 혀 끝을 가볍게 튕기는 짓궂음. 미소에서 키스로, 키스에서 미소로 향하는 우리의 이름의 구조가 마치 운명처럼 얽혀있었으므로……,
나의 이름은 네가 부르는 것만으로 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된다.
오로지 너의 이름으로 완전해지는 세계.
*
ㅡ다음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라.
이것은 신보다 위대하고,
악마보다도 사악하다.
부자들은 이것을 필요로 하며,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먹게 되면, 당신은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
N. E. W. T.
네 글자의 조합은 다음의 약자와 같다: Nothing, Eternal, Whatever, Teach.
Nothing, 시답잖은 수수께끼의 답이 고스란하다. 네가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네가 없으면,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달이 태양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다.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수식을 붙일 만큼, 태양과 달의 역학적인 관계에 있어 이보다 명료한 답은 없다. 그리고 그 관계는 뉴트와 민호의 관계와 유사하다. 뉴트는 민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무엇이 되더라도 그것이 뉴트일 수 없는, 오로지 민호로 완성되는 존재.
Eternal, 영원은 없다고 믿는 비관론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증거가 뉴트다. 세상 모든 유한한 것들 사이에서 찾은 단 하나의 영원불멸의 관념, 사랑, 서로의 시간이 맞물리지 못해 일어난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흔해 빠진 클리셰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과 사랑을 동일시하고, 죽음과 미지(未知)의 세계를 동일시하고, 미지의 세계와 영원을 동일시한다. 세계와 영원이 동의어가 되었을 때 사랑과 죽음과 영원이 동의어가 되었으므로 언어의 구조는 치밀하고 간교하다. 그러니 사랑은 영원으로 탈바꿈하여 뉴트의 이름 속에 자리잡는다.
Whatever, 모든 것은 민호를 위해서. 그게 무엇이든 익숙해져야 한다면, 민호를 위해서. 그게 무엇이든 저항해야 한다면, 민호를 위해서. 그게 무엇이든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민호를 위해서. 그게 무엇이든, 모든 가진 것을 다 팔고 목숨을 버리더라도, 모든 것은 민호를 위해서.
Teach, 사랑의 방식은 강요가 아닌 가르침으로. 세뇌가 아닌 교육으로. 뉴트는 모든 방식을 민호에게 가르친다.
M. I. N. H. O.
다섯 글자의 조합은 다음의 약자와 같다: Meaning. Ingrain. Need. Hope. Obey.
Meaning,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언가가 되는 과정. 이를테면 왼, 왼, 오른, 왼, 오른, 오른, 오른. 은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방향의 나열이지만 미로의 길을 기록한 길이라고 하면 그들에게는 간절한 정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는 말은 처음 듣는 다른 세계의 소리이자 아무런 뜻도 없는 소음에 불과하지만, 민호가 그것을 I love you, 라고 친절히 명명하면 뉴트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두 사람은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은밀한 암호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 은색의 반지가 그저 놓여있을 땐 아무것도 아니지만, 뉴트가 민호에게 선물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서약이자 청혼의 의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무언가가 되는 과정.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영혼에 씻기지 않는 기억을 새겨 넣는 과정.
Ingrain, 빼낼 수 없는 존재를 위해 천천히 스며드는 것. 결코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 것. 서로의 존재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조금씩 서로의 의미를 세상에 덧씌워 나가면서, 뿌리까지 배어드는 침투하는 사랑. 본질에 침투해서 언어로, 손짓으로, 눈짓으로, 어쩌면 오로지 상념에 잠기는 것만으로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질 때마다 뭉쳐지는 영혼.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녹아들고 나면 느끼게 되는 깊은 유대감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Need, 있으면 좋은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린 사람은 누구일까. 사랑을 시작할 때 계기는 있어도 이유는 없단다. 하지만 시작한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는 가장 단순한 이유가 필요하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지친다. 논리도 없이 감정만으로는 쉽게 잊어버린다.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고 논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장기적인 것이니까. 그러니 가장 명료하고 이해타산적인 이유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은 문장.
Hope, 희망 없는 사랑은 반드시 서로의 목을 조인다는 걸 민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므로 끝없이 희망한다. 어떤 나락에서 넘어져 구르고, 뒹굴고, 무너지더라도 함께 다다를 천국을 기약하는 것. 오로지 함께 하고 싶은 희망으로 살아남을 것. 절망을 알면서도 절망을 모르는 러너처럼 미로를 달릴 것. 절망을 알면서도 절망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랑할 것.
Obey. 복종으로 끝을 맺으며 서로의 목을 얽고 놓지 않는 재귀적인 사랑. 모두를 따르게 하는 리더가 온전하게 따르는 단 한 사람. 신이자, 교리이자, 모든 사랑의 정의.
NEWT,
MINHO.
관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서로의 이름만이 사랑의 정의가 된다.
그와 그 남자의 이름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정의의 밀접한 관계에 관하여.
마침.




